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1 ; 작가 - 캐서린 맨스필드 (Katherine Mans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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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1 ; 작가 - 캐서린 맨스필드 (Katherine Mans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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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10월 14일~1923년 1월 9일>



20세기 세계 문학사 새로 쓴  '뉴질랜드의 정신' 


캐서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손꼽힌다. 

뉴질랜드 중등학교 영어(문학) 시간 단골 인물인 그는 

지금도 많은 독자에게 ‘뉴질랜드의 정신’

(A New Zealand of the Mind)으로 존경받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질투하는 작가가 딱 한 사람 있다. 그에 대한 칭찬이 높으면 높을수록 나는 그가 나쁘다는 것을 더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Virginia Woolf, 버지니아 울프, 영국 소설가)

 

“당신은 메스꺼운 파충류에 불과해. 난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D. H. Lawrence, 로런스, 영국 소설가)

 

“그는 아주 매력 있는 작가이다.” (T. S. Eliot, 엘리엇, 영국 시인)

 

누구를 향한 찬사인가? 그가 도대체 누구인데 이렇게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부으며 매섭게 질투하는가?

 영문학사에서 내로라하는 발자취를 남긴 문인들이 질투하고 격찬하는 대상은 누구란 말인가?



20세기 초 ‘단편소설의 거목’으로 불려


 캐서린 맨스필드. 

 20세기 초 문단에 나타난 그는 영문학사에서 ‘단편소설의 거목’으로 꼽힌다. ‘단편소설’이라는 갈래가 아예 없었던 때, 그는 혜성처럼 나타나 문단에 굵은 획을 그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작가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함께 받았는지도 모른다. 뉴질랜드가 낳은 작가를 말할 때마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늘 앞에 서는 이유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1888년 10월 14일 뉴질랜드 은행(Bank of New Zealand, 1861년 설립) 총재를 지낸 아버지 해럴드 뷰챔프(Harold Beauchamp)와 평범한 어머니 애니 다이어(Annie Dyer) 사이에서 육 남매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첫 작품을 발표한 캐서린 맨스필드는 학교 에세이 대회에서 <항해>(A Sea Voyage)라는 작품으로 상을 받으며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유명 작가가 된 뒤 펴낸 <The Doll’s House>(인형의 집)이라는 작품에서 친구들과 함게 뛰놀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기도 했다.


1903년 캐서린 맨스필드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시절 뉴질랜드 명문가는 아들딸의 영국 유학이 의례적인 일 가운데 하나였다. 어린 문재(文才) 역시 그 ‘의례적인 일’에 함께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커 나갈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90, 아일랜드 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영국 극작가 겸 소설가)와 같은 영국문학에 심취한 그는 자연스럽게 문학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니던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 영국 런던에 있는 중등학교, 한국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학교 신문에 작품 대여섯 편을 발표했다. 

 


작품 세 편, 호주 멜버른 잡지에 실려


 1906년 공부를 마친 캐서린 맨스필드는 고향 웰링턴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문학 본산지인 런던에서 마음껏 문필을 날리고 있었기에 문학 토양이 거의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다행히 하늘은 문학 천재 편이었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쓴 작품 세 편이 호주 멜버른에서 나오는 한 잡지(The Native Companion)에 실려 세계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글쟁이로 만들 수는 없다”던 완고한 아버지도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작가의 삶이 고통스러워야만 불후의 명작이 나오는 것일까? 뱃속 아이가 채 햇빛을 보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어진 첫 번째 남편과 이혼…. 그러면서도 그는 삶의 쓴 잔을 담담히 마시겠다는 심정으로 단편을 써 내려갔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만난 두 번째 남자는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존 미들턴 머리(John Middleton Murry)였다. 그들은 함께 글을 쓰고 편집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한편으로 ‘두 마리의 호랑이들’(Two Tigers)이라는 말도 들어야 했다.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한 문단의 비난과 비평에 호랑이 발톱처럼 날카롭게 대응해 나간 탓이었다.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늘 돈에 허덕여 사무실을 자주 옮겨야 했으며, 그 까닭에 이곳저곳으로 떠도는 유랑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글 쓰는 이가 받는 형벌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가혹했다.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요양 치료

 

1차 세계대전은 캐서린 맨스필드에게 고통이자 축복이었다. 사랑하던 남동생(Leslie, 레슬리)이 서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그는 삶과 고국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가든파티>(Garden Party), <서곡>(Prelude), <만灣에서>(At the Bay), <환희>(Bliss)를 바로 이때 썼다. 떠나 온 뉴질랜드, 사랑하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절절히 묘사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로 캐서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 최고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가 만약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쓰지 않고 영국 풍경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작품을 써 나갔다면 그저 그런 영국 작가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캐서린 맨스필드 작품이 ‘낙양의 지가를 올리기’ 시작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몸은 천천히 혈기가 빠지고 있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작품 탓인지 참말로 피가 쏟아져 내렸다. 결핵이었다. 영국보다 날씨가 따뜻한 프랑스, 이탈리아를 찾아 머물렀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1923년 1월 9일 오랜만에 찾아온 남편과 파리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입을 막으며 2층으로 올라간 캐서린 맨스필드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넷이

었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손꼽힌다. 뉴질랜드 중등학교 영어(문학) 시간 단골 인물인 그는 지금도 많은 독자에게 ‘뉴질랜드의 정신’(A New Zealand of the Mind)으로 존경받고 있다. 



'20세기 단편소설의 혁명을 불러온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가 살아 있을 때 쓴 작품집은 세 권에 불과하지만(죽고 나서 두 권이 더 나옴), 전 세계 문학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평론가들은 그를 ‘20세기 단편소설의 혁명을 불러온 작가’라고 평한다. 전통의 틀을 깨고 사람의 심리 갈등에 초점을 맞춰 섬세하게 그려낸 그에게 준 가장 멋진 찬사였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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