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6 ; 마오리 지도자 - 피터 벅 (Peter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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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6 ; 마오리 지도자 - 피터 벅 (Peter 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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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10월~1951년 12월 1일>



뉴질랜드가 낳은 '폴리네시아의 위대한 추장' 


피터 벅은 체육인으로, 의사로, 정치인으로, 군인으로 

그리고 인류학자로 다재다능한 삶을 살았다. 

70 평생 살아오면서 그가 쏟은 마오리 사랑, 

폴리네시아 원주민 사랑은 오늘도 기억되고 있다. 

피터 벅은 죽었어도 그가 남긴 흔적은 살아 숨 쉬고 있다.



뉴질랜드 역사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혼혈’ 문제다. 유럽계 이민자인 파케하 피와 마오리 원주민 피가 섞여 나온 혼혈인. 그들에게는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붙은 ‘혼혈’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큰 짐이 됐다.


 마오리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백인들은 혼혈인들을 하류 계급으로 다루었고, 마오리 사회에서는 파케하에 빌붙어 ‘뭔가 이익을 보려’하는 소인배로 여겼다. 양쪽에서 다 치이는 불쌍한 존재였다.

 그런 나쁜 조건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가 있었다. 피터 벅(마오리 이름은 테 랑이 히로아, Te Rangi Hiroa)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다재다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혼혈인이다.



어린 날 계모 밑에서 자라

 

피터 벅은 1877년 10월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마오리 어머니 피를 받아 타라나키 우레누이(Urenui)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계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우레누이초등학교(Urenui Primary School, 1876년 설립)를 마치고 마오리들이 많이 다니던 테 아우테 칼리지에 들어갔다. 학업 성적은 덕스(Dux, 최우수 졸업생)를 차지할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뽐냈다. 공부뿐이 아니었다. 럭비와 육상 주장을 맡았다. 팔방미인이었다.


피터 벅은 장학금을 받아 오타고대학 의과대에 들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100여 해 전 마오리가 의과대에 입학하는 일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었다. 그는 그 힘든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스포츠에 열심을 보였다. 높이뛰기 전국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따냈다. 또 학생회장으로 뽑힐 만큼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디 한 군데 빠지지 않는 젊은이였다.


1904년 의과대를 마치고 새내기 의사가 됐다. 뉴질랜드 역사에서 첫 마오리 의사였다. 6년 뒤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 더니든병원(Dunedin Hospital)과 서니사이드 정신병원(Sunnyside Mental Hospital)에서 일했다. 1905년에는 그레이마우스(Greymouth, 남섬 서쪽 해안가의 가장 큰 도시)에서 방문의사로 진료했다. 

그레이마우스에서 피터 벅은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마거릿 윌슨(Margaret Wilson)을 만났다. 그녀는 파케하 순종이었다. 그때만 해도 흔치 않은 이종 문화의 결합을 사람들은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오리 공중보건에 관심 많아

 

의사로 어느 정도 발판을 다진 피터 벅은 북섬 주요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마오리들의 공중보건 상태가 어떤지를 살폈다. 파케하보다 높은 사망률은 보건 상태가 나빠 빚어진 결과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부는 사망률을 줄이지 않고서는 마오리들과 진정한 평화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마오리 의사, 피터 벅이었다.

그는 전국 곳곳을 돌며 현대식 보건체계가 왜 중요한지를 힘주어 말했고 그의 주장은 마오리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자기들과 같은 피가 흐르는 피터 벅의 참마음을 넉넉히 알아주었다. 


1909년 피터 벅은 정치에 뛰어든다. 영 마오리 파티(Young Maori Party, 젊은 마오리 당)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정치를 통해 마오리 권익을 높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마침내 진보당 국회의원 자리를 차지했다. 선량으로 활동하면서 마오리 건강을 챙기는 일에 큰 비중을 두었다. 아내와 함께 그들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의사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다.


피터 벅은 1914년 총선에서 베이 오브 아일랜즈 지역구로 나섰지만 파케하들이 대부분인 지역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간발의 표차로 아쉬운 고배를 마셨다. 미련 없이 털고 나갔다. 정부는 그에게 의료공무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갈리폴리전투에서 큰 공로 세워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피터 벅이 지니고 있던 애국심이 다시 살아났다. 마오리들이 참전해 줄 것을 호소했다. 자기도 군의관으로 싸움터에 합류했다. 갈리폴리전투(Gallipoli)에서 큰 공로를 세워 무공훈장을 받았다.

‘다재다능’의 결정판은 인류학 쪽 관심이었다. 피터 벅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사 일을 보면서도 자기 뿌리인 마오리를 포함한 태평양 섬 주민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일에 빠져 살았다.

 

피터 벅은 1923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태평양과학회의(Pacific Science Congress)에서 마오리 이주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자리를 같이한 하와이 비숍 박물관(Hawaii’s Bishop Museum) 관장 허버트 그레고리(Herbert Gregory, 1869~1952) 눈에 들었다. 그는 피터 벅에게 자기와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피터 벅은 하와이로 떠났다. 거기서 인류학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펴낸 많은 논문과 책은 폴리네시아(Polynesia, 태평양 중부와 남부에 펼쳐져 있는 1천여 개의 섬)를 새롭게 보는데 큰 몫을 했다. 피터 벅은 ‘폴리네시아의 위대한 추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석 달 시한부 삶 선고받고도 논문 완성

 

피터 벅은 1936년 비숍 박물관 관장이 됐다. 하와이대학과 예일대, 로체스터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땄다. 뉴질랜드 몇몇 대학도 같은 대접을 해주었다. 1946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와 파케하의 피가 반반씩 섞인 아들로 태어나 멀고 먼 폴리네시아의 한 섬 하와이에서 생을 마쳤지만 그의 혼은 늘 고국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는 훗날 어머니로부터 우스갯소리와 참을성, 폴리네시아인의 존엄성을 배웠고, 아버지로부터는 유럽계 교육, 과학 정신, 열심히 일하는 마음을 배웠다고 말했다.


피터 벅은 1948년 큰 병에 걸렸다. 의사는 석 달밖에 못 살 것이라고 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음에도 그는 자기 일을 내려놓지 않았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어떻게 해서든 끝내야만 했던 논문에 마침표를 찍었고, 몇 해를 꿈꾸었던 뉴질랜드 강연 여행도 치러냈다. 석 달이 열두 번 지나고 나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피터 벅은 체육인으로, 의사로, 정치인으로, 군인으로 그리고 인류학자로 다재다능한 삶을 살았다. 70 평생 살아오면서 그가 쏟은 마오리 사랑, 폴리네시아 원주민 사랑은 오늘도 기억되고 있다. 피터 벅은 죽었어도 그가 남긴 흔적은 살아 숨 쉬고 있다.

 피터 벅은 1951년 12월 1일 호놀룰루에서 삶을 마감했다. 유골은 조상의 혼이 스며있는 고향 땅에 묻혔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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