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72)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가문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72)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가문 <히브리서 11:17~22>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믿음의 본을 새겨가며, 믿음의 가문을 세워간 네 명의 인물, 이른바 창세기에 기록된 4대 족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이르는 분량의 모든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가문을 세워가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우리 안에 이러한 소망을 새겨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문으로 굳건히 세워지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받을 때에, 말씀 안에 담겨진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정에 그대로 실현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가문, 그 출발은 아브라함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새로운 약속의 시대를 열어갑니다. 이른 바 믿음의 시대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 모든 아브라함의 삶의 기록을 압축하여 단 세절에 담고 있습니다. 17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안에는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자손의 번창함이라는 약속을 받았는데, 그 출발점은 아들 이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자손의 번창함과 이삭의 번제는 함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손이 번창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려면 이삭이 죽으면 안되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면 이삭이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드립니다. 그리고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통해 믿음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의 시대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럼 지금 히브리서의 말씀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떤가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였으니, 아브라함과 같은 부활신앙으로 이겨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믿는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땅은 후에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지는 터전이 됩니다


여러분!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이미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단순하게, 그대로 믿고 순종함을 통해, 믿음의 가문을 견고히 세워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약속의 계승자 이삭입니다.


리브가가 태중에 아이를 가졌을 때에, 아이들이 태중에서 싸웁니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의 앞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에서는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즐겨하는 아주 남자다운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이런 에서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집에서 요리하고 살림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삭이 나이가 들고,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보지를 못합니다. 큰 아들 에서를 축복하고자 에서에게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오라고 지시를 합니다. 에서는 신이 나서 사냥을 하러 나갔는데, 리브가가 그 틈을 타서 에서가 아닌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모든 상황을 꾸밉니다. 이삭은 잘 보지를 못하니까, 아들을 가까이 오게 하고, 향취를 맡습니다. 


얼마 뒤 에서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 끝난 뒤입니다. 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야곱을 원망하고, 울면서 축복을 구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면 이삭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무효!” 그러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깨달은 거죠. 하나님께서 이전에 주신 말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이삭은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이삭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내려놓고, 야곱을 향한 축복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에 대해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는 말씀을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확신하는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내 뜻이, 내 생각이, 내 소견이 앞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깨닫고 돌이키면 됩니다. 깨닫고 인정하면 됩니다. 야곱을 축복한 이삭처럼 말이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향하신, 또한 내 자녀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고, 깨닫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계승해가는 견고한 믿음의 가문을 세워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축복의 전달자 야곱입니다. 


야곱은 4명의 족장들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요, 또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대단하게 기억될만한 사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이 말년에 애굽에 가서 손주들, 자신의 아들도 아니고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손주에게 축복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이 한 일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이어서 야곱은 49장에 자신의 열 두 아들을 불러놓고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정성을 다해 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47장에 야곱이 애굽에 와서 바로 왕을 만나게 되는데, 애굽의 바로를 향해서도 축복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48장, 49장까지 야곱의 말년에, 야곱이 했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이 끝난 후 야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야곱의 본래 모습은 누군가를 향해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아니죠. 아시다시피 야곱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내가 모든 복을 다 차지하겠다.” 이러한 일념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야곱의 말년의 모습은 계속해서 남을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복 받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한 인물입니다. 그 사모함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 그 축복에 대한 사모함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이기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일평생의 삶 속에서 훈련의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야곱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받기만을 바라던 자에서 나누는 자로의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이미 받아누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내 자녀, 내 손주들을 축복하고, 더불어 하나님께 힘을 다해 경배함으로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전세계적인 기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자기 가족을, 자기 민족을, 또한 애굽을 비롯한 주변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구원해내는 큰 역사를 이룹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 왕 다음 가는 인물로, 실제 영향력에 있어서는 바로 이상 가는 인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마지막 임종 직전에 이렇게 유언합니다. 창세기 50장 25절입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 22절이죠. “하나님께서 후에 반드시 우리 민족을 이 땅에서 이끌어내실 날이 올 것인데, 그때 내 뼈를 들고 나갈 것을 지금 맹세하시오.” 그럼에도 요셉은 자손들을 향해 단단히 맹세하게 합니다. 지금 요셉의 유언이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좋아보여도 여기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요셉은 미래를 바라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으로 이끄실 것이니, 그때 너희들은 내 해골을 매고 가라.” 그래서 자신의 해골을 매고 가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모세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저 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크신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더불어 나의 삶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를 통해서, 내 손주들을 통해서, 나의 믿음의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더 크신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때에, 우리 가정이, 우리 가문이 믿음의 가문으로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견고한 믿음의 가문으로 세워질 수 있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에 하나 더하여, 오늘 제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모든 가정마다 우리 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가문으로 날마다 날마다 더욱 견고하게 세워져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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