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31) 가지 않은 길 석운(필명)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詩)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 밤에 왜 계속해서 프로스트의 시(詩)가 머릿속을 맴돌았는지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이것저것 할 일들이 있으니까 그날 밤은 좀 일찍 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자초한 모양이었다. 잠은 오지 않고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른 프로스트의 시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내려왔다. 그리고 프로스트의 시집을 찾아내 그날 밤 내 머리를 맴돌았던 시(詩) ‘가지 않은 길’을 찾아 천천히 읽었다.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내가 좋아했기에 아마도 그 밤에 또 그의 시가 떠올랐으리라.
숲속으로 두 갈래 길이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적게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가지 않은 길’ 중 마지막 연)
마지막 구절 중에서도 “그리고 나는……”이라는 말은 시인의 진솔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 같아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똑같이 아름다워 보이는 두 길 가운데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을 때의 시인의 그 망설임과 불안함이 “그리고 나는……”에서 계속되지 못하고 줄을 바꾼 뒤에야 “나는 사람들이 적게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라고 적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삶의 기로
기나긴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누구라도 한두 번은 삶의 갈림길에 섰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두 갈래로 갈라진 길 앞에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한길을 택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자기 신념에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막상 길을 택한 뒤라도 한참을 가다가 때로는 혹시 내가 길을 잘못 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휩싸이는 경우를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선택의 기로는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나올 때였다. 그때 내가 누구나 당연하다고 느끼는 취직의 길을 택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했어야 한다는 후회는 아마도 평생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두 갈래 길 중 취직의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고 학문의 길은 사람들이 적게 다니는 길이었으리라. 그 두 갈래 길 앞에서 나는 망설였었다. 물론 망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지금도 인정한다. 집안 형편이 경제적 여건이 나이 든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옥조이고 있었고 내 욕심만을 채워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계속 나를 붙잡고 있었다.
시인(詩人)의 선택
“몸이 하나이니 오랫동안 서서 할 수 있는 한 다른 길을 내려다보고,”라고 시(詩)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 망설임을 표현했다. 거기까지는 나도 시인과 같았다. 그러나 그다음 연에서 시인의 선택과 나의 선택은 달랐다. “그리고는 한길을 택했습니다. 다른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어쩌면 더 마음을 끌었던 길을,”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아, 시인은 얼마나 현명했고 또 결단성이 있었나! 그러나 나는 훨씬 아름답고 훨씬 마음을 끌었던 길을 단지 여건이 안 된다는 비겁한 핑계를 구실로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연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거예요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가슴이 아프다. 시인도 나도 한숨짓는다. 그러나 시인의 한숨과 나의 한숨은 너무도 다르기에 나는 땅이 꺼지도록 다시 한번 한숨을 짓는다. 시인은 그 옛날 두 갈래 길에서 바른 선택을 했기에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기쁨의 한숨을 짓고 있고 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기에 회한의 한숨을 짓는 것이다.
아직도 갈 수 있는 길
잠이 오지 않았던 그 날 밤 프로스트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한번 한숨을 쉬던 그때 나는 돌연 내 눈을 찌르고 들어온 시의 한 구절을 읽으며 혼자 주먹을 쥐었다. 세 번째 연의 중간쯤에 있는 이 구절에서 시인은 두 길을 다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 첫 번째 길은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나는 모른다. 이 시인이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두었던 그 길을 어느 날 다시 가서 걸었는지 아닌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날 밤 그 구절을 읽으며 나는 다음 날이 아직 내게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위안이 되었고 나는 혼자 주먹을 쥐었던 것이다. 비록 늦었지만 살아있는 한 다음 날은 아직 내게 남아있고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간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가지 않은 그 길을 가야하고 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스트의 시를 읽으며 잠을 못 이루었던 그날 밤 뒤늦게 잠자리에 든 나는 내내 단풍나무 숲속의 길을 헤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걸었는지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 길을 지금이라도 걸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보통 날보다 오히려 늦게 잠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나는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아침 대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시를 한 편 썼다.
가지 않은 길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이제 칠십이 되었으니
마음먹은 대로 내 길을 가자
무엇이 그리 두려워서
가지 않은 길인가
이제 마음 놓고 가자
망설이지 말고 가자
다음날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가자
가지 않은 길은 아름다운 길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마음먹은 대로 가도 틀을 벗어나지 않는 나이가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먼 훗날 이렇게 말하면서 기쁨의 한숨을 쉬고 싶다.
‘그때 늦게라도 가기 시작한 그 길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