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23) “저…, 영어 못합니다”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23) “저…, 영어 못합니다”

일요시사 0 1605

<사진: 김인식> 

 

 

 글_메이

 

1996년 4월, 제2회 부산 동아시아대회를 앞두고 대회 준비를 위해 괌에서 각 나라 대표단들이 모였다. 그 당시 나는 부산에서 회사 홍보를 위한 이미지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었다. 동아시아대회의 시상식과 관련한 부산시 공모에 참여했고 우리 회사가 선정됐다.

 

나는 450명의 시상식 도우미들의 총관리를 맞는 책임자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괌으로 향했다. 부산시청 임원과 체육계 관계자와 함께 회의를 위해 방문했다. 주최국인 만큼 이틀 전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 회의장을 점검하고 각 나라 대표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우리 회사에서 하는 일 중에는 큰 기업 모델하우스 오픈을 앞두고 고객을 맞이하는 직원 교육과 병원 직원들의 환자 응대법에 대한 교육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국제적 행사를 맡아보긴 처음이어서 다소 긴장되었다. 내가 회의에 참석한 이유는 분위기를 먼저 익혀야 그 감각으로 국제행사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의 하루 전날, 그 당시 IOC 위원이었던 김운용 씨가 도착했다. 동아시아 각국 대표들도 두세 명씩 호텔로 모여들었다. 회의 당일 행사장에 내려가 보니 양옆으로 각 나라 대표들이 앉고 중앙에는 회의 진행자가 앉도록 자리 배치가 되어 있었다. 대표들은 차례로 들어와 자국의 명패 자리에 가 앉기 시작했다.

 

그날 회의 진행자는 김운용 IOC 위원이었다. 김 위원의 인사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나의 영어 실력은 부끄러울 정도였다. 막힘없이 쏟아지는 김 위원의 영어 실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매끄러운 회의 진행 능력이었다. 각 나라 대표들에게 발언권을 주면서 의견을 수렴하고 결정해나가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김 위원의 유머에 회의장이 웃음바다가 됐다가도 그의 진지함으로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압도되었다. 그때 나는 각오를 다졌다. 영어공부에 대한 열정에 불이 붓는 순간이었다.

 

그 일이 있기 두 해 전 1994년 5월로 기억한다. 부산 MBC 교양국에서 만드는 해외 특집프로를 맡게 되었다. PD와 카메라 촬영기사와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한국에서 내보내는 방송이라 영어가 많이 필요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카메라 앞에 선 나는 로마제국을 이야기했고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로 꼽히는 나폴리에서는 나폴리를 보고 죽으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바티칸박물관이나 성베드로대성당은 내부 촬영에 규제가 있어 카메라에 담지 못했지만 오픈된 트레비분수나 원형극장 콜로세움에서는 유적지 설명과 함께 촬영이 순조로웠다.

 

촬영이 거의 끝나갈 무렵 PD는 이곳에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다며 촬영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지금까지 한국어로 진행하던 것이 영어로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PD는 나를 보며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라고 한다.

 

‘이를 어째. 그 정도라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가는 걸 느끼는 잠시, PD는 한마디 더 내뱉는다.

“외국 여행을 꽤 다녔다는데 그 정도야 뭐.”

셰프와 손님에게 음식에 대한 질문지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난 PD에게 다가가 고해성사를 하듯 낮은 어조로 말했다.

 “저…, 영어 못합니다.”

 

 굴욕의 시간이 지난 한 달 후 부산 MBC 텔레비전 아침방송에 인터뷰 방송이 나갔다. 물론 셰프와 손님에게 영어로 질문하고 그들이 대답하는 동안 한글 자막이 나갔다. 어떻게 했냐고? 영어를 잘하는 PD가 질문지를 영어로 써줬고 난 달달 암기를 해서, 마치 영어를 잘하는 양 질문했다. 그들이 대답하는 동안 나는 다 알아듣는 척하며 고개를 흔드는 리엑션 장면까지 아주 완벽한 연기였다. 방송이 나간 후 지인들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영어를 잘할 수 있냐며 다들 부럽다고 한마디씩 한다. 그렇다고 자존심 상하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어 난처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괌을 다녀온 후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폰 잉글리시. 굳게 마음먹은 결심은 작심삼일이 되어 폰 잉글리시는 모닝콜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괌에서의 자극과 이탈리아에서의 부끄러움이 떠오를 때면 다시 ‘열공’ 모드가 된다. 보통 매일 아침 첫 질문이 내일은 뭐 할 거냐로 시작하기에 미리 연습을 해두었다. 내일은 주말이니 쉬면서 집에서 청소도 하고 영화도 볼 것이라고 준비한 뒤 가벼운 마음으로 일찍 깨어 수화기를 들었다.

 

영어 선생님은 질문한다. “오늘 뭐 할 거야?” 멘붕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오늘이 아니고 내일로 물어줘야 한다고. 이런 모닝콜로 1년을 보냈다.

 

1997년 5월 10일, 10일 동안 열리는 제2회 부산 동아시아 대회가 개막했다. 2,1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여 육상, 축구, 수영, 체조 등 13개 정식종목에서 기량을 겨루었다. 주요 경기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시상자들은 주로 IOC 위원이거나 외국에서 온 올림픽에 관계되는 사람들이었는데 간단한 영어로 자리 안내를 하거나 때로는 인사말을 주고받아야 했다. 일 년 넘게 새벽잠을 설치며 공부한 보람의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것은 영어의 걸음마를 떼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진행요원들은 실수 없이 대회를 잘 끝냈고 폐막식 행사에서 난 대회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그때 맺은 동아시아대회와의 인연으로 아마 내가 영어권인 이곳 뉴질랜드에 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후 20년이 지났건만 난 아직도 자신있게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I can speak English well.”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8-08-20 22:39:20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0 Comments
포토 제목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