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우리들의 50년 친구, 로이 윌슨(Roy Wilson)

시사인터뷰


 

[특별 인터뷰] 우리들의 50년 친구, 로이 윌슨(Roy Wilson)

일요시사 1 3,628

 

한국 사람들과 많은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70~80년대 초창기 한인 사회 궂은일 도맡아…‘미스터 알아봐 달라별명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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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 날행사 때 로이 윌슨과 변경숙 씨. 로이의 넥타이 맨 아래 한국과 뉴질랜드의 국기가 있다.

 

지난해 이즈음 햇살 좋은 날, 로이 윌슨(Roy Wilson) 씨의 집을 방문했다. 그의 아내 변경숙 씨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로이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우리 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넓은 창 너머 저 멀리 랑기토토 섬에는 늦봄을 만끽하는 길고 흰 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로이는 뉴질랜드 한인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의 뉴질랜드 삶은 한국 사람과 결코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꼭 한국 아내를 얻어서만은 아니다. 50년 긴 세월 동안 그 어느 키위보다 한인들과 애환을 함께 해왔다.

이 글은 올해 114() 노스쇼어 병원과 지난해 1019일 아내 변경숙 씨의 도움을 얻어 로이와 나눈 얘기를 정리한 것이다. ‘우리들의 50년 친구를 더 많은 한인이 진심으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1932 8 15일 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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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말, 영국에서. 왼쪽이 로이, 오른쪽이 형 피터, 가운데는 여동생 앤.


로이는 1932 8 15일 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당시 군대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하던 그는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응시자가 너무 많아 현실로 이룰 수는 없었다.

변경숙 씨가 로이에게 들었다는 말.

한국은 하나님이 버린, 아주 가난한 나라라는 말이 돌았다. 그 땅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가엾고 불쌍해 작은 힘이지만 도와주고 싶었다.”

로이는 성정이 착한사람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걸 사람이 해야 할 당연한 도리로 여긴다.

1954년 로이는 뉴질랜드(뉴플리머스)에 발을 내디뎠다. 두 살 위인 형 피터가 이미 터를 잡고 있었다. 일종의 형제 초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로이는 포스트 뱅크(Post Bank)에서 일했다. 그 뒤 웰링턴으로 옮겨 1992 12월 퇴직할 때까지 같은 직종에서만 줄기차게 한 길을 걸었다.

로이와 한국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1962년 대한민국과 뉴질랜드가 수교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뉴질랜드 방문을 계기로 한-뉴 사이의 관계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한국 원양 어선의 뉴질랜드 진출이었다.

 

1960년대 말 한국 선원과 인연 맺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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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대한민국 정부는 로이 윌슨에게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로이는 그때 웰링턴 항구 바로 앞에 있는 포스트 뱅크에서 근무했다. 공교롭게도 문만 열면 보이는 곳이 한국 배들이 정박하는 곳(Princess Wharf)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다시 변경숙 씨의 도움말.

선원들이 한국으로 전보나 생활비를 보낼 때 그 일을 해준 사람이 로이였어요.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데, 한국 선원들이 유독 더 눈에 띈 거지요. 산적 같은 머리털에다 생선 냄새가 폴폴 풍기는 그 사람들을 정성껏 대하다 친해진 거예요.”

1979년 말, 로이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국 선장을 통해 한국 규수를 소개받았다. 얼마 안 있어 로이는 김포공항행 비행기를 탔다. 1980 5, 로이와 변경숙은 서울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신부 변경숙은 스물여덟, 신랑 로이는 마흔여덟, 장모인 변경숙 씨의 어머니와 같은 나이였다.

1980년부터 1992년 오클랜드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기까지 로이 윌슨과 변경숙은 웰링턴 한인 사회의 기둥 같은 역할을 맡았다. 그 사이 아들 준호, 에릭, 대니와 딸 코리아나를 얻었다.

 

이민자와 유학생들의 민원 해결사 역할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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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웰링턴 한인들과 함께.


좋은 일은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일에 늘 로이가 함께 했다. 선원들의 해상 사고, 초창기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의 민원(?)을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로이였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국땅에 사는 한인들에게 로이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친구이자 삼촌 같은 역할을 묵묵히 해 주었다.

물론 뉴질랜드한인회(현 웰링턴한인회)를 비롯해 공공 모임에도 소리 없는 헌신을 다했다. 로이는 주로 재무 일을 맡았다. 전공을 살려 실질적인 도움을 준 셈이다.

1992 60세가 된 로이는 은퇴를 하고 식솔과 오클랜드로 올라왔다. 오클랜드 한인 사회의 태동기라고 보면 된다. 그즈음 점수제 이민이 도입되면서 한인들의 숫자가 하루게 다르게 늘어났다. 자연히 로이의 일도 끊이지 않았다.

변경숙 씨의 말.

로이의 별명이 미스터 알아봐 달라예요. 초등학교 아이들의 학교 입학부터 수십만 달러짜리 사업이나 집을 사는 일까지 모든 일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로이는 될 수 있으면 해결해 주려고 애를 썼어요. 그게 로이의 천성이니까요.”

로이의 건강이 나빠지기 한두 해 전까지도 그는 한인 사회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다. 종교 단체들의 설립에 도움을 주거나, 오클랜드한인회 사무총장을 하거나, 브라운스베이노인회의 회장을 맡거나 하는 등 오랜 세월을 한인과 함께해 왔다. ‘한인회의 날행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한인 행사 때마다 그의 인자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2013년 대한민국 정부, ‘국민포장수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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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대한민국에서 아내 변경숙과 신혼여행 중.


1960년대 말부터 2018년 최근까지 50여 년간 한인들의 든든한 친구이자 삼촌 역할을 해온 그가 교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역시 변경숙 씨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결과에 승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한인 사회의 분열된 모습을 보며 많이 안타까워했으니까요. 회장은 회장의 일을, 재무는 재무의 일을 잘하면 된다는 게 로이의 생각이었어요.”

반면에 로이가 본 한국 사람의 장점은 정이 많다는 것이다. 그걸 꾸준히 이어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로이의 아내로 40여 년을 함께 산 변경숙 씨가 본 로이의 삶은 어땠을까?

평생 남의 탓을 하는 것을 못 봤어요. 조용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꼭 아내로서가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서도 존경해요.”

로이 윌슨은 201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포장을 받았다. 한인 사회를 위한 그의 헌신을 기억하겠다는 뜻이었다.

얼마 전, 노스쇼어 병실에서 로이는 아내 변경숙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50년간 한국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 말을 꼭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한평생 생활은 소박했고, 마음은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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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19일 로이 윌슨과 사진을 찍었다.

웃옷 가슴에 ‘2003년 제주아시아유도 선수권 대회라는 글자가 보인다


시계를 돌려 지난해 1019.

나는 로이와 점심을 함께했다. 대화 중간중간 그는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천진무구한웃음이었다. 아니, 로이 윌슨의 삶이었다.

그날 그는 ‘2003년 제주아시아유도 선수권 대회’(2003 JEJU ASIA JUDO CHAMPIONS)라는 글이 새겨진 웃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소박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 증거였다. 나는 그게 가슴에 아렸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생활은 소박했고, 가슴은 따듯했던 사람이었다.

로이 윌슨의 86년 삶을 좁은 지면에 다 담을 수는 없다. 그저 내가 본 그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우리들의 50년 친구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 우정을 로이 윌슨이 그 어디에 있든 이어나가야 한다. 뉴질랜드 한인 1세대인 내가 이 글로 남기려고 한 이유다.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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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윌슨(Roy Wilson)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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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32 8 15(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남)

가족 관계: 아내 변경숙, 아들(준호, 에릭, 대니), (코리아나)

 

약력

 

1950~1952년 영국 무선 통신병으로 근무

1954년 뉴질랜드 이주

1955~1987년 뉴질랜드 Post Bank 근무

19805월 변경숙과 결혼

1988~1989년 뉴질랜드 국세청(IRD) 근무

1989년 뉴질랜드 Lower Hutt 국립병원 근무

1992년 오클랜드로 이사

 

한인 사회 관련 일

 

1950년 한국전쟁 참전 지원했다가 신청자가 마감돼 취소

1960년대 후반부터 웰링턴 선원회관과 로어헛트 교회에서 한국 원양 어선 선원 돌봄.

1980년대 중반 웰링턴 한·뉴 친선협회 총무와 재무 맡음

1980년대 중반 뉴질랜드한인회(웰링턴)에서 수년간 재무 맡음

1993~ 오클랜드 다민족연합회에서 봉사

1994~ 한인 종교단체들 설립 기초 도움

1995년 오클랜드한인회 사무총장

1997~1999년 오클랜드한인회 사무장

1997년부터 수년간 Browns Bay Senior Citizens Club 회장, 총무, 재무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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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레몬
우선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건강이 아주 않좋다는 전언을 들으며...
항상 미스터 윌슨 씨는 천상 친절함이 몸에 베어있는 할아버지 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는 분입니다..
오랫 시간동안 우리교민들 위해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도움을 베풀어주신점에 말할수 없이 감사한 마을 뜸뿍 담아서
보냅니다,.
그 부인 역시 한인사회에 큰 공헌을 했지요..원래 천성이 착한 분들이라 많은 교민들 과 우정을 나누고 있지요..
부디 건당을 회복 하식ㄹ 빌며 여는때와 변함없이 자상한 모습으로 뵙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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