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 2-3 캔(KEN)농장 임근규 대표
일요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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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11:40
사랑스런 세 딸과 아내 김순희가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생명을 나눌 수 있다는 건 농사꾼 최고의 기쁨이죠”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농약 많이 친다’ 근거없는 헛소문에 시달려…가슴을 열어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 아파
“교민들은 캔농장을 욕하기 시작했다. ‘농사꾼이 농사만 짓지 왜 가게를 내느냐’는 게 불만이었다. 기존 농산물 외에 매출을 올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국 식료품을 떼어다 팔아야 하는 경제적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비싼 임대료 탓이었다.
이때 임근규는 심한 맘고생을 했다. 생이빨 네 개가 빠졌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었다.
<지난 호에 이어>
가게 하나, 주인 다섯…오곡이 풍성
손놀림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누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파 뿌리를 잘라내고, 누군 보드라운 손으로 배추를 절이고, 또 누군 하늘하늘한 손으로 무청을 다듬고 있다. 저 멀리 계산대에선 숫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어느 일요일 오후, 한 가게(글렌필드 캔 마트)의 풍경이다.
오곡처럼 잘 익은 임근규와 김순희의 다섯 자식.
그날 다섯 명의 주인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큰 주인의 이름은 임종설(24세), 막내 주인의 이름은 임혜진(10세)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들 제 할 몫을 다 한다. 때깔 고운 토기처럼 오랜 시간이 빚어낸 결과이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표정이 밝다. 흙의 아이들에게서 삶의 맑은 기운을 읽었다.
처음 캔농장 취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 농장은 임근규 씨와 그의 아내 김순희 씨가 일궈낸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몇 번의 취재 끝에 얻은 결론은 캔 농장의 주인은 이들 부부와 그들의 소산인 다섯 명의 자식이라고 믿게 되었다. 아들 둘, 딸 셋의 땀과 눈물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배포가 크신 분이세요. 한번 결심하면 꼭 이루시고 말지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헤쳐나가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큰아들 종설 군의 말)
“아빠는 무척 부지런하세요. 술을 많이 드셔도 늦게 일어나는 법이 없으세요. 그래서 우리도 부지런할 수밖에 없어요.”(큰딸 혜련 양의 말)
다섯 자식에게 동일하게 칭찬을 받는 임근규는 훌륭한 아버지임이 분명하다. 거친 말투에서 묻어 나오는 애정, 따끔한 질타에서 우러나오는 기대를 자식들은 눈치채고 있다. 농부가 알찬 곡식을 자랑스러워 하듯, 곡식 역시 자기를 키워준 농부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임근규와 김순희 사이에 태어난 다섯 곡식(오곡)의 이름은 이렇다. 종설(큰아들), 종성(둘째 아들), 혜련(큰딸), 혜수(둘째딸), 혜진(막내딸). 모두 캔 농장의 주인들이다.
데어리 플렛 땅 산 그해, 오이값 크게 올라
2007년 7월, 어느 날.
임근규는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샀다. 아내와 다섯 자식의 행복한 보금자리였다. 집에는 큰 온실이 딸려 있었다. 아니, 온실 옆에 집이 딸려 있었다고 하는 게 맞다. 온실에서 일곱 식구가 먹고살 돈이 나오는 만큼 그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만 했다.
“집을 처음 보던 날, 이 집은 내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또 내 꺼야만 했고요. 부동산중개인에게 무조건 사 달라고 부탁했어요. 웃돈을 조금 더 주기는 했지만 정말로 잘 샀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임근규는 그 집을 딱 한 번 보고 결정했다. 방 다섯 개도, 넓은 거실도, 그림 같은 주변 풍경도 그에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잘 정돈된 온실 안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이와 토마토가 맘에 들었다. 키위 목사가 주인이었다. ‘그분의 은총이었을까’, 임근규는 뉴질랜드 농사 이력 상 최고의 이익을 그해 얻었다. 오이값이 엄청나게 뛰었기 때문이었다.
이년 여 동안을 공판장에 내다 팔았다. 그 몫은 주로 늘 든든하기만 한 큰아들, 종설이가 해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새벽에 일어나 차를 몰고 떠났다. 그 새벽길이 불안하고 안쓰러워 아내 김순희 씨는 잠을 설쳤다. 어미의 정은 불빛이 되어 아들 가는 길을 인도해 주었다.
알바니에 가게 내, 맘고생 심하게 하기도
두 해 뒤인 2009년 7월, 임근규는 알바니에 가게를 하나 냈다. ‘캔마트.’ 웨누아파이에 있던 소꿉장난 가게 같았던 초라한 가게 말고 번쩍번쩍 멋진 가게였다. 무엇보다 고속도로를 끼고 있어 몫이 좋았다.
“한국 농산물 직판장 같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다른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도 함께 팔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 기대만큼 따라와 주지 않았어요. 결국, 우리 농장 작물만 팔게 되는 결과가 됐지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욕도 많이 먹었지요.”
교민들은(아니 어쩌면 다른 상인들은) 캔농장을 욕하기 시작했다. ‘농사꾼이 농사만 짓지 왜 가게를 내느냐’는 게 불만이었다. 기존 농산물 외에 매출을 올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국 식료품을 떼어다 팔아야 하는 경제적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비싼 임대료 탓이었다.
알바니 캔마트에서 손님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이때 임근규는 심한 맘고생을 했다. 생이빨 네 개가 빠졌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었다.
“사람들은 제 뜻을 이해해 죽지 않더군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시작한 게 아닌데… 저는 철저히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백년대계 아니 십년대계라도 생각하고 농사일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어요.”
임근규가 이때 잃은 것은 생이빨 네 개 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큰아들 종설이가 학업을 중단한 것이 더 마음이 아팠다. 매시대학교 상대 1학년에 다니던 종설이는 아빠 사업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아빠에게 있어 큰아들 종설이는 분신이었던 셈이다.
그는 술을 한잔 할 때마다 이 일을 못내 가슴 아파한다. 자신의 꿈 때문에 자식의 꿈을 저버리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탓이다. 어쩌면 농사꾼의 대를 더 잇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가게가 안정되어 갔다. 매출도 올랐고 평판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농사꾼 임근규의 우직함이 빛을 발했다. 공중에 이리저리 떠도는 대중의 말보다는, 지상에서 정확히 제 길을 따라 움직이는 임근규의 발이 더 분명했다.
‘캔농장, 농약 많이 친다’ 헛소문 돌아
임근규는 온실 옆에 따로 조그만 온실을 몇 동 지었다. 그에게 있어 온실 만들기는 심심풀이 땅콩 삼아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한국 농사 경험이 그를 농사에서만큼은 절대지존의 자부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 온실에다 한국 작물을 심었다. 깻잎과 호박과 고추가 자랐다.
임근규(오른쪽)가 농장에서 파뿌리를 다듬고 있다.
혹시나 교민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모종을 팔았다. 꼼꼼한 아내 김순희가 주로 이쪽 일을 맡았다. 교민들은 몇십 주씩 사다가 자기네 집 뒷마당에 심었다. 그럴 때마다 이들 부부는 농사꾼이라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 무언가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생명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으뜸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도 겪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상하게 헛소문이 돌더라고요. ‘캔농장은 농약을 많이 친다’, ‘중국산 고춧가루를 캔농장 고춧가루라고 속여 판다’, ‘아이 엄마가 둘째 부인이다’ 등등. 한 마디로 어이없는 소문들이 돌고 돌았어요. 그때마다 가슴을 열어 보여 주고 싶었어요.”
임근규의 설명.
아이 엄마가 둘째 부인이라는 뜬소문은 아내가 어려 보이니까 그럴 수 있어 오히려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농약을 많이 친다’는 말은 뉴질랜드 농사 실정을 아는 사람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라고 했다. 일차 산업 중심 국가인 뉴질랜드가 이를 절대 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산 고춧가루’ 역시 캔농장을 직접 와서 보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농사는 정직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아빠는 꿈쟁이”…인생 후반전 꿈 기대
임근규의 포부는 어디까지인가?
3년 전 7월, 그는 헬렌스빌에 있는 55에이커(66,000평)짜리 땅을 샀다. ‘끝이 안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직접 봐도 한없이 넓고 넓은 땅이다.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다.
“데어리 플렛에 있는 온실이 내 성에 차지 않았어요. 더 넓은 땅, 더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이죠. 몇 년을 찾아 헤매다가 내 맘에 꼭 드는 땅을 만났어요. ‘아, 여기다 내 꿈을 펼쳐야지’하는 생각을 했지요.”
헬렌스빌에 있는 땅은 데어리 플렛과 10km 정도,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헬렌스빌 골프장 인근) 처음 그가 땅을 샀을 때 땅은 황무지와 다름없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어 처분만 기다리던 땅이었다.
임근규는 줄다리기 끝에 이 땅을 손에 쥐었다. 부속(?)으로 딸려 있었던 허름한 주택을 개조, 숙식을 해결해가며 농장 개척 일에 매진했다. 그의 손과 발이 닿은 지 천일도 안돼 황무지가 황금빛 옥토로 변했다. 지금은 열 동이 넘는 온실과 배추와 무, 고추가 자라는 노지가 농사 천국 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임근규의 피와 땀, 그리고 가슴 속에 품은 무한한 꿈이 이를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헬렌스빌 농장 진흙길, 그 너머에 있는 꿈은 무엇일까?
분명히 여기가 끝이 아닐 것이다. 작가가 꿈이라는 막내딸, 혜진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매일 꿈만 꾸나 봐요. 시간만 나면 공책에다 늘 뭔가 그리거든요. 무엇을 썼다 지웠다 하는 것을 보면 아빠는 분명 꿈쟁이인 게 분명해요.”
임근규가 그의 인생 후반전에서 펼칠 꿈은 과연 무엇일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