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1) IR 이준영 검사

시사인터뷰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1) IR 이준영 검사

일요시사 0 2,043

 

한인 사회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보좌관·학원 경영 등 다양한 경험…‘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믿어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오클랜드 타카푸나에 있는 한 호텔 커피숍, 멋진 양복을 차려입은 젊은 친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준영입니다.”

 난 첫눈에 반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자신 있는 태도, 젊은이의 기백이 넘쳐 보였다.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계획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바로 이준영이었다. 검사라는 그럴듯한 직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한인 사회를 위해, 1세대와 2세대의 다리 역할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여덟 살에 부모 따라 이민…IT 전문가 꿈꿔 

 이준영은 1992 11월 부모와 형을 따라 오클랜드로 이민 왔다. 그의 나이 겨우 여덟 살, 새 세상은 그렇게 천진하게열렸다. 다음 해 2월 마누카 초등학교(Manuka Primary School) 4학년으로 들어갔다. 그 뒤 로즈미니 칼리지(Rosmini College), 랑기토토 칼리지(Rangitoto College)를 마쳤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에 빠져 살았어요. IT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었어요. IBM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큰 회사에 들어갈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뜻하지 않은 여백이 제 인생을 바꿨어요.”

 이준영은 Year 12(그때 Form 6)를 마치고 오클랜드대학에 입학했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영민해 친구들보다 한 해 빨랐다. 원서에 있는 지망학과란에 컴퓨터 사이언스를 써놓고 공간이 하나 남아 있어 별 생각 없이 법학과를 추가했다.(복수 전공)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교환학생으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갔다. 이준영의 표현대로 술 마시고 당구치며 신나게 놀다가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남 어느 식당이었을 거예요.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옆자리에서 신세 한탄을 하는 젊은 직장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다니던 직장이 맘에 안 들었던 것 같아요. 그 순간 어쩌면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았어요.”

 이준영은 10년 계획을 세웠다. ‘강산이 변할 즈음자신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그 계획은 그 뒤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목표의 8부 능선은 늘 달성해 왔다.

 

 

2006년 광복절, 하버 브리지에 태극기 게양

 그는 대학 5학년 때 1년간 오클랜드대학 한인학생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한인 사회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널리 알려졌다. 2006 8 15일 광복절, 태극기가 하버 브리지 위에서 휘날렸다. 이준영을 중심으로 한 한인학생회(오클랜드대학, 매시대학, AUT 공동)가 서너 달 공들여 오클랜드시와 접촉해 이룬 쾌거였다.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한인 사회를 위해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견을 나눴어요. 그때 나온 얘기 가운데 하나가 태극기 게양이었어요. 관계 기관에 절차를 문의했는데, ‘UN 소속 나라가 아니면 안 된다는 답이 왔어요. 어이가 없었지요. 대한민국이 유엔에 가입한 지가 수십 년 지났잖아요. 그 정도로 한국의 존재가 미미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팠어요. 영화 제목처럼 태극기 휘날리던그날이 제 학창 시절 가장 뜻깊은 날이었어요.”

 대학 졸업을 앞둔 이준영은 어렸을 때부터 꿈꿔 왔던 IT 전문가 보다 법을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해서 잡은 첫 직업이 당시 국민당 국회의원이었던 펜시 웡의 보좌관이었다.   

 이준영은 그때쯤 심각한 고민을 했다. 졸업 무렵 그는 한국이나 미국 같은 큰 나라에 가서 능력자로 멋지게 젊음을 만끽하고 싶었다. 고액 연봉에 고급 차, 그리고 황금빛 앞날.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더 큰 부담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 다들 더 큰 나라, 많은 연봉을 찾아 뉴질랜드를 떠난다면 그 누가 이 나라를 지킬까하는 염려였다. 그는 뉴질랜드 사회와 한인 사회에서 본보기(롤 모델)’가 되고 싶었다.

 보좌관 생활을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그가 한인 사회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일이 있다. 2세대를 위한 진로 정보의 날행사였다.

 “제가 칼리지와 대학교에 다닐 때 멘토를 별로 못 만났어요.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이 했고, 가지 않아도 될 길을 가기도 했지요. 그게 마음속에 한으로 남아 있어 후배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뜻으로 시작했어요.”

 

후배들 위해 네 차례 진로 정보의 날열어

 이 행사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졌다. 오클랜드에서 세 번,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 번을 가졌다. 웨스트레이크 보이스 하이 스쿨(Westlake Boys High School)에서 열린 오클랜드 행사의 경우, 1천여 명이 훌쩍 넘는 학생과 부모들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누렸다. 그때 이준영이 후배들에게 해준 말 가운데 하나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였다. 가끔 그 행사를 기억하는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선변호사, 경찰 소속 검사로 일하면서 이준영은 교육 사업에도 손을 댔다. 사업체 이름은 ‘The Hakwon(학원)’. 일종의 보습 학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낮에는 변호사(검사)로 일하고, 밤에는 학원 교사(멘토)로 뛰었지만 냉엄한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2년도 채 안 돼 문을 닫았다. 그의 말대로 이준영 인생의 암흑기였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금 돌이켜 보면 20대 중반 그 경험이 저에게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지금 IR소속 검사로 일하면서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세금을 못 내 법정을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요. 아마 그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을 향한 동정심은 추호도 없었을 거예요.”

 

 

한인 사회 하나 되지 못해 마음 아파요

 이준영이 아직 진로를 못 정한 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도움말은 무엇일까?

 “10대 말이나 20대 초는 자신을 알아가는 때라고 생각해요. 될 수 있으면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덧붙여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고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거예요. 앞서 말한 것처럼 10년 뒤 계획을 세웠으면 좋겠어요. 해마다 조금씩 고치면 결국 마음속 꿈을 이루는 날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저의 경우, 사소한 것 같지만 스노보드 잘 타기’, ‘모터바이크 면허 따기등을 희망 사항(Wish List)에 올려놓았는데 결국 성공했거든요.”

 한인 1세대와 2세대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그가 1세대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일까?

 “1세대들의 공을 무시할 수 없어요. 그들은 저희는 물론 2세들에게 거름 같은 존재이지요. 그렇지만 아쉽게도 한인 사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중국이나 인도 하다못해 우리 보다 숫자가 훨씬 적은 일본 지역사회도 잘 뭉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민 1세대에 속하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돌아보면 먹고 사느라, 그리고 버텨내느라 너나 할 것 없이 다 분주하게 지내왔다. 그렇지만 이 땅의 한인 역사가 수 대(), 아니 수십 대에 걸쳐 이어지려면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 1세대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를 말이다.

 


솔로몬과 같은 멋진 판결 내리는 판사 되고 싶어

 인터뷰가 끝날 즈음, 나는 이준영이 40대 초가 될 10년 뒤가 궁금했다. 설령 이루기 힘든 꿈이라도 한인 1.5세를 대표하는 그의 마음속 수첩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엿보고 싶었다.

 대화 도중 느낀 그의 야무진 포부는 이렇다.

 ‘나는 판사가 되어 있을 거예요. 아시안 최초의 판사. 뉴질랜드를 바로 잡는데 판사만큼 어울리는 자리는 없을 거라고 믿어요. 특별히 가정 교육, 학교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죄의 길에 들어선 젊은이들에게 솔로몬과 같은 멋진 판결을 내리고 싶어요.”

 맞다. 이준영이 갖고 있는 포부가 훗날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뉴질랜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이준영 개인은 물론 우리 모두가 꿈꾸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에게 무한한 복이 있기를 빈다.

_프리랜서 박성기


 

 

 참고: 이준영 검사는 현재 Inland Revenue 타카푸나 점에서 주로 탈세 기소 건을 맡아 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뉴질랜드는 경찰서, 국세청 등 누구나 기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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