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 2 Auckland City Pharmacy 이희성 약사

시사인터뷰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 2 Auckland City Pharmacy 이희성 약사

일요시사 0 1,394


1990년대 초반 시작된 점수제 이민으로 많은 한인들이 뉴질랜드에 들어 왔다. 그때 30~50대였던 1세대들은 이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1.5세와 2세대들이 잇고 있다.< 교민신문>은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는 뜻에서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라는 기획물을 연재한다. 뉴질랜드 각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가 그 대상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닐 것입니다

2012한인 최초 약학 박사학위 따약사는 배려심 깊어야

 

 후덕(厚德): 어질고 덕이 많음.’

 그를 만났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단어다. 거기다 직업까지 더하면 어질고 덕이 많은 약사가 된다. 인터뷰 내내 후덕이라는 단어가 내 뇌리를 맴돌았다. 그의 말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그리고 가진 꿈속에서도 그러했다. 약사가 갖춰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가 후덕이라고 믿었다.

 ‘현모양처(賢母良妻): 인자하고 어진 어머니이자 착하고 좋은 아내.’

 21세기 대명천지에 좀 안 어울리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이만한 사자성어도 없다고 본다. 여기서 ’()’()를 그의 직업인 약사로 대체해도 괜찮다.

 


첫 시험(생물)에서 23점 받고 대성통곡

 이희성은 1994 3, 뉴질랜드로 이민 왔다. 그의 부모는 오클랜드나 크라이스트처치 같은 대도시 대신 남섬에 있는 더니든을 골랐다. 대부분의 한인들과는 다른 정착지였다. 순전히 자식 교육 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온 희성은 한 달 뒤 집 근처에 있는 칼리지에 들어갔다. Year 10(당시 Form 4)이었다. 사춘기 소녀 희성의 뉴질랜드 학교 첫인상.

 “자유분방 그 자체였어요. 친구들이 너무 풀어져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한국과는 정반대였죠. 그때 문화 충격이 컸어요. 영어가 안 돼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고요. 첫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엉엉 울었어요.”

 Year 10 첫 학기(Term 1) 과학(생물) 시험에서 그는 겨우’ 23점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나름 모범생이었던 그에게는 엄청난 수모였다. 한국말로는 다 아는 것을 영어로는 이해할 수도, 답을 쓸 수도 없는 난제였다. 성적표를 받은 날,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독을 품었다. ‘밤을 세워서라도 빨리 영어를 정복하겠다는 다짐이었다.

 ESOL과 영어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영어 실력을 키워 나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공부할 때는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골머리를 앓았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었다.’ 그저 외우고 또 외우고, 듣고(카세트 테이프) 또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이 늘었다. 그다음 과학 시험에서 무려’ 70점을 얻었다. 마음속 자신감은 100점이 넘었다.

 

오타고 약대 입학, 약국에서 일하며 위기 넘겨

 순풍에 돛달고 항해하듯 희성의 중등학교 시절은 무난히 흘러갔다. 몇 해가 지나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아빠가 헬스 사이언스(Health Science, 의대 예비 과정)과에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의사나 치과 의사, 혹은 약사가 되라는 뜻이셨어요. 저는 내심 약사를 목표로 하고 오타고대학에 입학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집안 환경이 그쪽이었기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결정했지요.”

 희성의 아버지는 약사 출신이다. 어린 희성은 서울 종로 6, 약국이 몰려 있는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약국이 놀이터이자 공부방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약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약사의 꿈 역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어렵게 약대에 진학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공부는 훨씬 힘들었다. 다행히 더니든 시내 약국에서 시간제로 일을 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 20대 초, 누구보다 예뻐지고 싶었던 욕망을 약국 안에 있던 화장품(샘플)으로 달랬다. 그러면서 약사라는 직업도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기의 도움말(처방)을 따른 손님들이 약 효과를 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자주 해왔기 때문이었다.

 약대 4년을 무사히 마쳤다. 그 뒤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1년의 인턴 과정을 끝내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오타고대학 약물학과에서 리서치 펠로우십(Research Fellowship)을 한 것이다. 주로 이명증과 관련된 연구를 하면서 공부도 할 만 하구나하는 자신감을 가졌다.

 


뉴질랜드 약대 전 세계 50위 안에 들어

 희성은 2007년 오클랜드로 올라와 박사 학위에 도전했다. 5년 뒤인 2012년 그는 한인 최초 약학 박사라는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 사이, 그는 결혼해 애도 낳았고 오클랜드 퀸 스트리트에 약국도 하나 차렸다.

 “박사 논문의 주제는 뇌파와 관련된 것이었어요. 그 당시, 뉴질랜드에서 파티 필(Party Pill)이라는 환각제가 한창 유행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약의 해악을 몰랐어요. 세계적으로 아무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죠. 미국의 FDA(식품의약국)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제 논문을 인용해 썼어요. 그 어느 때보다 약사로서 보람이 컸었죠.”

 희성의 말에 따르면 뉴질랜드에는 약 1천 개의 약국이 있다고 한다. 해마다 200명씩 새 약사가 나온다. 오타고대학에서 100, 오클랜드대학에서 100. 뉴질랜드 인구에 견줘 약사 숫자가 좀 많은 편인데, 이 문제는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앞으로 약사 꿈을 가진 학생들을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도움말은 무엇일까?

 “약대를 졸업했다고 꼭 약사가 되는 것만은 아니에요. 연구 기관에서 일할 수도 있고, 정부 의약 관련 기관에서 일할 수도 있어요. 또 출판사 같은 곳에서 약대 전공자를 찾기도 하고요. 쉽게 말해 다양한 곳에서 약대 출신을 필요로 하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는 덧붙여 뉴질랜드 약대의 수준은 전 세계에서 50위 안에 들 정도로 명성이 높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성격의 학생들이 약사라는 직업을 고르면 좋을까?

 “무엇보다 배려심이 있어야 해요. 손님들은 모두 아픈 사람들이에요. 약국에 올 때는 도움을 받으려고 오잖아요. 그들 마음을 잘 헤아려 법 테두리 안에서 무조건 힘이 되어 주어야 해요.”

 


약사는 건강 전문가”…늘 공부하는 자세 가져야

 희성은 후배들에게 약사 자격증을 받는 순간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새 약이 자주 나오고 또 정부 정책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 더 이어지는 이희성의 도움말.

 약사는 건강 전문가’(Health Professional)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아무리 사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직장(약국)에 들어서는 순간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잘못 하다가는 한 생명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춘기 소녀 시절 부모를 따라 이민을 와 이제 삼십 대 중반의 고개를 넘은 이희성. 그는 약학 박사라는 듬직한 자격증 외에도 오클랜드 시내 약국’(The Auckland City Pharmacy)을 비롯해 노스쇼어 서니눅(Sunnynook)과 오클랜드 공항 근처에 약국을 갖고 있다. 직원만 해도 열 명이 넘는다. 물론 이름이 같은 남편 이희성<부부는 일심동체, 아니 일심동명(一心同名)이라고나 할까> 헌신적인 도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저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을 존경해요. 날마다 노력하는 사람을 높이 사죠. 오늘의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발전이 없다고 생각해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닐 것이다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어요. 내 삶도, 우리 약국도 그렇게 될 거예요.”

 더불어 그는 조금은 성숙한 도움말도 덧붙였다.

 “제가 어릴 때는 경쟁심이 심했어요. 지고는 못 살았어요. 그런데 나이가 좀 들다 보니(그는 내 앞에서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럴지도 몰라요.(그는 현재 딸 둘을 두고 있고, 곧 셋째가 세상 빛을 볼 예정이다)”

 

뿌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잊어서는 안돼

 인터뷰 마지막 무렵, 특별히 더할 말은 없냐고 물었다. 그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는지 자세를 가다듬고 힘주어 말했다.

 “저는 한인 1. 5세로 이민 와 한국과 뉴질랜드 두 나라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믿어요. 저 역시 한때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심하게 겪었어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려 우리 모두 뿌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후덕한 약사.’

 그와 한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다. 나는 나보다 어린 친구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동시에 한인 사회 앞날이 밝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21세기 인터넷 시대에는 좀 안 어울리는 단어지만 현모양처같은 약사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뉴질랜드 한인 사회에 큰 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_프리랜서 박성기

표지 사진_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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