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그룹 영빈관의 숨겨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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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A그룹 영빈관의 숨겨진 비밀

일요시사 0 1721 0 0

100년 문화재 허물고 지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서울 모처에 위치한 A그룹 영빈관이 100년이 넘은 문화재 한옥을 철거하고 지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및 관계부처의 문화재 보존·관리에 허술함이 드러났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해당 가옥은 A그룹 측이 외국에서 귀빈이 방문하면 머무는 용도로 활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바로 옆집이 지난해 11월18일 개관해 일반에 공개된 ‘백인제가옥’이다.

백인제가옥은 1913년 친일파 한상룡이 완공해 올해로 103년을 맞은 문화재 한옥으로 지난 1977년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서울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 다음으로 큰 규모(113칸짜리 한옥)를 자랑하며 건축 당시부터 최신공법에 최고급 자재(만주흑송)로 지은 궁궐급 한옥이다.

백인제가옥의 동쪽에 위치한 A그룹 영빈관 자리는 원래 백인제가옥에 속해 있었으나 1935년 당시 소유주였던 최선익이 대지를 분할해 타인에게 판 것을 계기로 백인제가옥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다가 2011년 말 A그룹 B회장이 사들여 다음해 기존 부속채(손님채로 추정)를 철거하고 새로 현대식 한옥을 지었다. 이 한옥이 현재 A그룹이 영빈관으로 사용 중이라고 밝힌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40년부터 건축물관리대장에서 확인되는데, 집의 구조 및 위치로 볼 때 백인제 가옥 건립 당시부터 존재했던 부속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유명한 친일파이자 기업가였던 한상룡의 집엔 역대 총독, 조선 및 일본의 귀족, 정재계의 실력자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손님들이 머무는 별채 역할을 한 한옥을 A그룹이 사들여 별다른 제제나 허가 절차 없이 허문 것이다.

외국 귀빈 방문시 머무는 용도 활용
“정부 허술한 관리실태 드러나” 지적

백인제가옥은 지난 100여년간 한상룡(1913)→한성은행(1928)→최선익(1935)→백인제 및 가족(1944)→서울시(2009)로 소유권이 여러 차례 이동했다. 1935년 당시 소유주였던 최선익은 <조선중앙일보> 부사장에서 물러나 백인제가옥에서 은거 중이었다. 자신에겐 집이 너무 크고 본채의 동쪽에 위치한 손님채(현 A그룹 영빈관 자리)는 조용히 칩거 중인 자신에겐 맞지 않는 낭비적 용도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등기부등본에 의하면, 최선익은 1935년 9월, 대지를 93-3으로 분할하고 1938년 12월 윤교승에게 팔았다. 매입 후 윤교승은 8개월 만에 별채가 있는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땅을 93-4번지로 분할해 1939년 12월 계성(주)에 매각했다. 남은 93-3번지의 땅과 집은 자녀로 추정되는 윤택선에게 1940년 소유권을 넘겼다. 그 후 몇 차례 주인이 바뀐 후 현재 B회장의 소유가 됐다.

그렇다면 지난 2012년 ‘멸실’ 당시 해당 한옥은 어떤 보존상태였을까. 본채(안채·사랑채·별당·처가채)는 지난 1977년 3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구조변경에 제약이 따라 보존이 매우 잘 돼 있는 상태다. 내부 목구조가 아직도 건재하고 외형도 비가 들이치는 하부부분을 제외하면 육안으로 봐도 변형이 보이지 않는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원형이 잘 보존돼왔다.

 


▲ 백인제가옥의 손님채. 철거되기 전의 모습 (사진출처 = 구글어스 김대호)

백인제가옥은 건립 당시부터 수백 년을 내다보고 지은 최고 수준의 건물로, 본채 및 부속건물 전체가 당시 희귀한 ‘만주흑송’이라는 최고급 목재로 튼튼하게 지었다. 최근 개관을 앞두고 수년에 걸쳐 세심하게 복원되면서 최고 수준의 보존상태를 회복, 유지하고 있다. 별채 역시 동일한 공법, 목재로 건립됐다. 이로 볼 때 별채였던 손님채 역시 양호한 보존상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 건립
5년 전 매입

<한상룡가옥(현 가회동 백인제가옥)의 원형과 조영개념>(박상욱, 2013)에 따르면, 손님채는 남쪽을 바라보는 ㄷ자형의 채에 우측날개 끝에 동서방향의 작은 채가 덧붙여진 형식이었고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방이 있으면서 그 끝에 부엌과 누마루를 둔 구조다. ‘북촌 한옥/건물 표시도(2000)’에서도 지붕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앞서의 논문에 의하면, 일반적인 살림채 구조로 보기엔 무리가 있고 오히려 큰 집에서 손님들을 위해 제공하는 단일건물의 성격이다. 손님채는 한상룡이 1913년에 지었던 본래의 부속채가 이어져 온 것이다. 또 누마루에 전체 4개방을 갖춘 161.98㎡(49평)의 비교적 큰 규모의 한옥으로, 부주의한 멸실로 인해 그 문화재적 가치가 영원히 회복할 수 없게 됐다.

사실상 철거 당시 100년을 맞은 문화재 한옥이 아무 규제도 받지 않고 허물어진 것으로, 분필로 인해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한 사이에 학계, 서울시, 문화부 및 문화재청, 시민단체의 무관심 속에서 그 문화적 가치가 알려지지 못하고 멸실된 것이다.

그룹 측은 “전혀 몰랐다”
B 회장 개인소유 선긋기

박상욱 ㈜건축사사무소 자향헌 대표는 “1977년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분필한 영역이 함께 등록되지 못한 원인이 가장 컸다”며 “조금만 더 일찍 연구가 됐더라면 손님채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가옥의 내력을 아무도 몰랐던 거다. 사실 한옥의 상태는 좋았다. A그룹 입장에서도 고급 한옥이긴 하지만 자기가 계획한 용도에 안 맞으니까 허문 거다. 그런 집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촌일대는 1980년대까지 한옥 보존, 청와대 근처라는 안보상의 이유 등으로 미관지구로 보존되다 1990년대 들어서 건축규제가 완화되면서 많은 한옥이 철거됐다. 2000년대 들어 북촌주민과 전문가, 서울시가 함께 ‘북촌가꾸기사업’으로 훼손을 막아왔다. 시는 전통한옥을 살리자는 흐름 속에서 조례를 제정하는 등 한옥보존 기조를 유지해왔다.

특히 건축인허가시에 시청 ‘한옥위원회’에 건축계획안을 제출하고 허가받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사항이 아니어서 소유주의 재산권 행사를 막을 수 있는 제재 근거가 전혀 없다. 앞서 A그룹의 백인제가옥 손님채 철거 사례에서 확인했듯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고택이 헐릴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현재 A그룹 영빈관은 건축계에서 ‘현대판 백인제가옥’이라고 정의될 정도로 잘 지어진 고급 한옥이다. 한 건축학자는 “자기 목적에 맞게끔 잘 지어진 집”이라면서도 “백인제가옥은 대지계획을 잘한 반면 B회장의 가옥은 땅을 건물로 다 채운 답답함이 있다. 한옥의 미학은 마당인데 작은 중정을 하나 넣었을 뿐 마당이 없이 방으로 다 덮은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육송으로 지은 건축학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집”이라고 귀띔했다.


 


해당 가옥은  현 시가 52억가량으로, 건축 당시 방탄유리로 마감했다고 한다. B회장은 해당 가옥을 비롯해 평창동 저택, A그룹 소속 호텔 등에 번갈아가며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지방문화재
그냥 허물어

A그룹 홍보실 측은 <일요시사>에 “해당 가옥은 그룹 소유가 아닌 B회장 개인 소유”라며 “그런 내력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안 했을 것이다.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 한 것뿐”이라고 답했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백인제가옥’ 직접 가보니…   

친일파 한상룡 살다 도망

가회동엔 ‘한씨 가옥’이라고 불리는 집이 두 채 있다. 정독도서관(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전 경기고)과 A그룹 회장 저택 사이에 위치한 백인제가옥과 맞은편 산업은행관리가라고 불리는 근대한옥이 그것이다. 전자는 1913년에 건립돼 올해 103년을 맞은 한옥으로 대지 907평, 건평 165평에 달하는 근대한옥이다. 후자 역시 규모는 이보다 덜하나 가회동에서 윤보선가옥과 백인제가옥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한옥이다.

두 가옥 모두 일제강점기 유명한 친일파이자, 금융가였던 한상룡이 소유했던 집이다. 한상룡은 백인제가옥에서 1928년 7월까지 24년을 살았고 이후 산업은행관리가로 이사가 1946년 일본으로 도주할 때까지 살았다. 바로 옆집인 177번지는 역시 친일파로 유명했던 박흥식이 거주했다. 후에 명당자리라고 소문이 나면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사들였다.

한상룡은 한성은행(조흥은행, 현 신한은행) 전무로 일하던 불과 33세의 나이에 백인제가옥(1944년 집을 사들인 백인제 박사의 이름을 따 명명)을 건립했다. 인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지대에 조성된 집으로, 일가 14명의 대가족이 해당 가옥에서 살았다. 옆집인 A그룹 회장의 저택도 최초엔 원래 필지에 속했다. 한상룡이 젊은 나이에 대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했던 것은 그의 가문 배경에서 기인했다. 평생의 후견인이었던 완순군 이재완(고종의 사촌), 이완용(외숙), 이윤용(외숙, 대원군의 사위)을 통해 총독부 및 재계에 큰 영향력을 일생 동안 유지했다. 구한말 한상룡은 같은 양반 출신들이 대부분 관료로 입신출세할 때 한성은행에 취직해 기업가로서의 길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한상룡은 일제하 한성은행, 조선생명, 조선신탁 등 금융업을 중심으로 기업활동을 하며 평생 동안 무려 300여개의 각종 기업 설립과 경영에 관여했다. 그는 김성수-김연수 형제나 민씨일가, 박흥식, 장직상, 현준호처럼 자기 자본을 가지고 거대기업군을 일군 대자본가는 아니었으나 세계경제에 대한 식견을 갖고 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전문경영인’(CEO)으로 평가받았다.

일제강점기 경제발전에 기여한 만큼 한상룡의 ‘매국행위’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시부사와 에이이치, 메가타 다네타로를 조선의 3대 은인이라고 칭하고 그들을 포함해 역대 총독들의 송덕비, 동상 건설 및 전기 편찬을 주도했다. 또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른 ‘만주 붐’에 관심을 갖고 전쟁, 군수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인을 강제노역시키던 기업들이다. 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각종 시국강연회 및 담화를 통해 일제정책을 선전하고 전쟁협조 여론을 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이 본격화되자, 국방헌금을 내고 학도병, 지원병, 징병 독려에 나섰다.

한상룡은 1906년 가회동 93번지로 이사 와 1912년까지 인접한 가옥 12채를 매입해 부지를 확보, 다음해 저택을 완공, 7월부터 거주했다. 가옥은 첫눈에도 골목길에 면한 넓은 출입마당이 돋보이는데, 자가용 소유자가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이축된 높은 화강암 계단을 오르면 당시 경성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했다. 

입구에 들어서서 사랑중문을 통과하면 널찍하고 탁 트인 사랑마당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사랑채 담장은 당시 신식재료였던 붉은 벽돌을 써서 한상룡 자신의 현대성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개화기의 서양 선교사 주택이나 서양식 건물에 적용된 최신재료와 구법에 영향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24년간 거주하다 일본으로 도주
“히로부미는 은인” 대표적 매국노

가옥은 서쪽의 안채와 동쪽의 사랑채로 나뉘는데 사랑채와 사랑마당은 가옥의 얼굴이자 중심, 최고의 위계공간이다. 잔디가 깔린 넓은 사랑마당에서 한상룡은 총독, 기업가, 고위관료, 귀족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역대 조선총독이 모두 가옥을 방문했고 일본 정재계 인사들과의 교류의 장이자 장안의 명소였으며 석유왕 록펠러 2세가 내한시 방문할 정도였다. 가옥 자체에서 그의 권력과 야심, 사회활동의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가옥의 기둥 높이도 3.1m로 운현궁에 맞먹는 높은 주고를 자랑한다. 대들보도 일반 한옥보다 높다. 현재도 구하기 어려운 ‘만주 흑송’을 최초로 사용한 집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울시는 흑송을 구하지 못해 홍송으로 가옥을 복원했다. 최신식 근대요소와 의도적 일본요소를 도입해 건립 당시 최고 수준의 건축물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짓지 않고 속복도로 연결한 선구적인 시도가 눈에 띈다. 당시로선 귀했던 유리창과 외국서 수입해온 정원수, 일본식 벽장, 특히 안채 일부를 2층으로 만든 것은 낙성 당시에도 기사화 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아내가 머무는 안채는 겹방 형식을 수용해 사대부 가옥에선 보기 힘든 3칸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는 궁궐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형식으로 한상룡이 아내를 각별히 사랑하는 가정적인 성격이었음을 드러내준다. 

또 조선 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무늬’가 안채와 사랑채 벽에 두루 쓰인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일본 정재계 인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집임에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무늬를 적용한 것은 한상룡 본인이 왕족 집안이라는 점을 과시하는 자존심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백인제가옥은 근대양식과 전통양식, 사랑채의 사회성과 안채의 개인성, 한옥과 일본가옥 요소가 공존하는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양식의 근대한옥으로 평가받는다. 

박상욱 ㈜건축사사무소 자향헌 대표는 <한상룡가옥의 원형과 조영개념>에서 “한옥을 근간으로 한 목구조를 바탕으로 근대적 합리성이 구현된 집이자 전통적 한옥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성을 수용한 실험적 도시한옥”이라고 정의하고 “친일의 대가로 부여받은 지위와 조선경제의 일본 예속화를 향한 활동으로 축적한 자본으로 지어지고 그런 건립동기와 목적으로 활용된 건축이란 점에서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가옥은 그 건축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근대기의 씁쓸한 유산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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