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감선거 '로또선거' 전락 내막
"누가 누군지? 아무나 찍자!"
[일요시사=정치팀] 요즘 정치권에서는 교육감선거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교육감은 '지역 교육대통령'이라 불리는 중요한 자리다. 하지만 현행 교육감선거 제도는 지난 선거에서 '로또선거', '깜깜이선거', '묻지마선거' 등으로 불리며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로또선거로 전락한 교육감선거 실태를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앉아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거나 눈을 감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곧 이어진 추첨. 첫 번째로 추첨에 나선 사람이 상자에 손을 집어넣고 한참 동안이나 공을 섞었다. 그러나 5번 공을 뽑자 크게 낙심한 얼굴이다.
그는 잠시만 공을 들고 포즈를 취해달라는 사진기자들의 요청도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가 침묵에 잠겼다. 반면 다음 사람은 1번 공을 꺼내들자 동료들과 일제히 환호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마치 로또 추첨장을 방불케 했다. 지난 2010년 교육감선거 순번 추첨 현장의 모습이다.
로또 교육감?
이 같은 코미디는 전국 16개 시도선거관리위원회에서 치러진 시도교육감 후보자의 투표용지 순번 추첨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지역 정치 성향에 따라 첫째나 둘째 순번을 뽑은 후보자와 지지자들은 마치 당선이나 된 것처럼 만세를 부르거나 환호성을 질렀다.
교육감 선거는 정당공천이 금지되어 있다. 기호도 따로 부여하지 않고 추첨을 통해 투표용지에 게재되는 순서를 결정한다. 그런데 인지도가 낮은 교육감 선거이다 보니 상위번호를 뽑는 것만으로 높은 득표율을 기대할 수 있다. 유권자들이 특정순번을 특정정당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세가 뚜렷한 대구·경북 교육감 선거의 경우 다른 선거에서 여당의 기호인 1번의 평균 득표율이 46.2%고, 기호 2번은 15.2%로 나타났다.
반면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던 광주·전남은 다른 선거에서 야당 기호인 기호 2번이 평균 32.1%로 가장 많은 평균 득표율을 보였고, 기호 1번은 17.7%에 그쳤다. 특히 보수색이 강한 강원도에서는 진보진영의 민병희 후보가 깜짝 당선됐는데 민 후보가 1번을 뽑았기 때문이라는 게 지역 교육계의 평가다.
결국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는 전국 16개 시ㆍ도 중 '1번' 또는 '2번'이 당선된 지역이 10곳이나 돼 당선율(62.5%)이 절반을 넘었다. 특히 교육감 선거보다 더 인지도가 낮은 교육의원 선거에서는 82개 선거구 중 78곳이 1번 또는 2번 순번의 후보가 당선돼, 무려 95.1%의 당선율을 기록했다. 교육의원 역시 시ㆍ도 교육청이 제출한 교육정책과 예산안에 대한 의결권을 갖는 중요한 자리다.
공약이나 인물보다는 투표용지 기재 순서가 당선을 좌우했다는 지적이다. 교육감은 '지역 교육대통령'이라 불리며 각 시·도의 막대한 교육재정과 교육자치를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지만 이처럼 번호추첨만 잘하면 당선되는 로또선거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교육감 선거를 로또선거로 만든 결정적 원인은 '정당공천 배제' 때문이다. 교육이 정치논리에 휘둘려선 안 된다는 점에서 정당공천이 금지됐다. 하지만 정당공천 배제 원칙은 지난 선거에서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진보와 보수진영으로 나뉜 교육감, 교육의원 후보자들은 특정 정당 상징색의 선거현수막과 포스터 등을 만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투표 순번 추첨이 당락 좌우
"선거일보다 떨리는 추첨일"
정당 관계자들도 유세현장에 나와 찬조연설만 하지 않았을 뿐 후보자 옆에 서 있는 방식으로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보수ㆍ진보진영으로 나뉜 교육감 후보들에 대한 정당들의 음성적인 지원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선거가 끝난 후에는 성향을 달리하는 광역단체장과 교육감이 교육방침을 달리하며 갈등을 빚다 충돌하는 일도 잦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예산을 놓고 갈등을 빚다 중도사퇴까지 했다.
한 전문가는 "지난 교육감 선거는 정책대결이 아니라 사실상 이념대결이었다. 정치인들의 선거와 다를 바가 없었다"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정당공천 배제하고 교육감 선거를 로또선거로 전락시킨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 교육감 선거는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면서 더욱 깜깜이 선거로 변질됐다. 정당 공천이 배제돼 후보들이 우후죽순 난립한 데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니 아무래도 유권자들의 관심은 광역·기초단체장 선거에 더 쏠릴 수밖에 없었다. 후보자의 정책 및 인물검증 기회도 제도적으로 부족했다. 지난 교육감 선거가 끝나고 유권자들 사이에선 '사실상 찍었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기도 했다.
이렇게 순번추첨에 따라 희비가 크게 엇갈리면서 웃지 못 할 상황도 연출됐다. 불리한 순번을 뽑은 후보들이 순번추첨이 끝나자마자 대거 사퇴하고 나선 것이다. 교육계에서는 후보자들의 사퇴를 지켜보며 교육감선거가 기탁금 5천만원짜리 로또가 됐다며 혀를 찼다.
게다가 교육감 후보들은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사람들인데 막대한 선거자금을 부담해야 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자칫 선거에서 패하고 나면 평생 모아온 재산을 탕진하게 될 수도 있다. 교육감의 법적 선거비용 한도액은 서울 39억원, 경기도는 41억원에 달했다. 급기야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후보자 매수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을 해야 했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위 공청회에서도 참가자들은 교육감 직선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여야 간 입장 차이는 뚜렷했다. 새누리당 측 인사들은 직선제 폐지와 임명제 부활안을 적극 내세운 반면, 민주당 측 인사들은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뺑뺑이?
한 전문가는 "교육감 선거 제도의 폐해는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충분히 이야기가 나왔고 심각했다. 그런데 지난 4년간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다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서야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라며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는 여야 간 기싸움과 이권다툼 때문에 합의가 더더욱 쉽지 않다. 물리적 시간도 부족해 결국 올해 교육감 선거도 깜깜이, 로또선거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 된다"고 말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