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취재> '조폭 대부' 김태촌 마지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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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조폭 대부' 김태촌 마지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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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세계 호령하다 어둠에 영원히 잠들다

[일요시사=사회팀] 80년대 전국구 주먹시대를 열었던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64)씨가 지난 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숨진 김씨의 빈소는 다음 날인 6일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에 차려졌다. 관할 경찰서인 송파경찰서는 강력계 형사들을 아산병원에 급파했다. '주먹'과 '경찰'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장례식 내내 계속됐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중이던 '주먹계 거물' 김태촌씨는 지난 5일 새벽 패혈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김씨의 시신은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으로 옮겨졌다. 김씨가 숨진 다음 날인 6일 빈소는 아산병원 장례식장 2층 특실에 마련됐다.

유명인 화환 빼곡
곳곳서 90도 인사

김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장례식장에 모여들었다. 유가족들은 상주 리본을 달고 조문객을 맞았다. 중절모를 쓴 60대 남성부터 회색 코트의 20대 남성까지 조문객 대부분은 남자였지만 간간이 여자 조문객도 눈에 띄었다.

장례식장 주변에는 경찰이 포진했다. 파견된 경찰 인력은 150여 명이었다. 송파경찰서에서 출동한 강력팀은 빈소 앞 입구 전면에 배치됐다. 장례식장 에스컬레이터를 포함한 내부 곳곳에는 사복형사들이 자리했다. 건물 밖에는 둘씩 짝을 지은 경찰관들이 구역을 정해 순찰을 돌고 있었다. 1개 중대 규모의 전·의경은 2대의 경찰 버스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였지만 무전기를 든 형사의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씨의 빈소를 찾는 조문객은 늘어났다. 빈소 입구를 지키는 건장한 젊은 남성들도 세를 더했다. 빈소 입구와 10여m 떨어진 엘리베이터 앞까지 '주먹'들의 행렬은 이어졌다. 빈소와 연결된 화장실 앞에도 20여명의 남자들이 기립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마주 본 채 반듯한 자세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빈소 입구에는 100켤레가 넘는 구두가 조문 온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김씨의 장례 기간 중 빈소를 찾은 조문객이 약 3000명 규모라고 추산했다.

패혈증 심장마비로 사망…빈소에 3000명 몰려
장례식장 경찰 150여명 배치 "주먹들과 신경전"

빈소 옆 비상구 계단 앞에는 화환이 빼곡히 자리했다. 화장실 앞부터 시작된 화환 행렬은 에스컬레이터 앞까지 계속됐다. 화환을 보낸 이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송일현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장 등 기독교계 유력 인사를 비롯해 가수 설운도, 김태곤 등 음악계 인사, WBC 세계챔피언을 지낸 염동균, 동부프로미 농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강동희 등 체육계 인사까지 각계를 망라한 유명인들의 화환이 줄을 이었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 불법선거운동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는 권봉길 새누리당 선대위 국정홍보대책위원장의 화환 또한 눈길을 끌었다.

둘째 날에도 조문객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이미 첫째 날에 다녀간 하일성 전 KBO 사무총장은 김씨와 오랜 인연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86년 김씨는 프로야구 한 구단의 이사를 맡았었는데 당시 야구해설위원이었던 하 전 사무총장과 각별한 인연을 유지해왔던 것. 이밖에도 탤런트 임혁이 조문을 위해 아산병원을 찾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 탤런트 이동준씨도 지난 7일 저녁 지인들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이씨는 "형님과는 원래 건달, 연예인 이런 거 다 떠나서 친분이 있었고 좋은 분이었다"며 "잠깐 그쪽 세계에도 계셨지만 손 씻고 나중에는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그런 점을 훌륭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입원 당시의 고 김태촌씨 모습
▲서울대병원 입원 당시의 고 김태촌씨 모습

이외에도 "유명 걸그룹이 소속된 모 소속사 대표 K씨가 김씨와의 인연으로 빈소를 찾을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지만 장례식장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김씨의 장례식에 참석한 한 40대 남성은 "연예인들과 건달은 서로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면서 "보는 눈들 때문에 오지는 못해도 조의금은 다른 루트를 통해 보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30대 남성은 "빈소로 화환을 보낸 사람 중 거물로 분류되는 인사의 화환은 안쪽에 배치됐다"고 말했다. 화환을 보낸 이의 신원을 보호하는 방법인 셈. 유명인들의 화환 외에도 부산 영도파 두목 천달남, 칠성파 두목 이강환 등이 보낸 화환은 엘리베이터를 경계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쪽에 배치됐다.

빈소 바로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는 강력계 형사들과 채증 임무를 맡은 수사관들이 앉아있었다. 이들은 화환으로 가려진 빈소 안쪽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밤낮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한 형사는 "우리는 특별한 목적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상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40대 조직원
형사에 깐족깐족

이와 반대로 기자와 얘기를 나눈 중견 보스 A씨는 "사람들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조폭하면 매일 경찰과 치고받고 마약이나 하고 그러는 줄 아는데 요즘은 경찰이 영장 들고 찾아오면 손들고 '꼼짝마라'(움직이지 않는다)"라면서 "영화랑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어 "식구끼리 장례식 하는데 여기 언론이고 경찰이고 찾아오면 우리가 라이브로 싸우길 바라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40대 중견 보스 B씨는 "화나게 하면 아예 경찰이랑 붙을 수도 있지"라며 "태촌이형이랑 잘 알지는 못해도 도리로 온 사람들 많은데 (언론과 경찰은) 시간 아깝게 여기 뭐 건질 게 있어서 죽치고 앉아 있을까"라며 A씨를 거들었다.

A씨와 B씨 옆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20∼40대 조직원 10여명이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서 있었다. 몇몇 조직원은 경찰이 쓰고 있는 책상에 자신이 마신 음료 캔을 올려놓는 등 경찰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경찰의 표정은 다소 굳어졌다.

이때 조문을 위해 도착한 40대 남성은 '형님'인 50대 조직원을 복도에서 발견하고 "안녕하십니까"라며 깍듯이 90도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이 50대 조직원은 "너는 왜 그러냐. 이런 건 이제 어린 애들이나 해야 하는데" 등의 설교를 늘어놨다.

오후 5시 이후에는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10명 넘게 김씨의 빈소로 무리지어 가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이 중에는 외국 폭력조직원도 있었다. 중국 상해에서 왔다는 폭력조직원 5명은 등장과 함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저 중국인들이 누구냐"는 물음이 기자들 사이에 있었지만 경찰은 "중국에서 왔다는 사람의 신원을 한국 관할 경찰서가 어떻게 얼굴만 보고 파악하겠느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조문을 끝낸 중국 상해 조직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후 7시께는 민갑룡 송파경찰서장이 수행 경찰관을 대동하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민 서장은 상주 근무 중인 강력팀을 격려하며 "이번 임무가 끝나면 휴식을 좀 취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원파악과 관련해서는 "현장에 있는 일선 경찰이 조폭의 얼굴을 무작정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수배자 명단 조회' 등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국구 등 전현직 조폭 조문 행렬
중국 상해 조직원도 몰래 다녀가
"화나게 하면 짭새고 뭐고 없어"

밤이 깊어갈수록 김씨의 발인을 지켜보기 위한 조폭계 원로들의 방문은 계속됐다. 한 원로 주먹은 새벽이 되자 건물 복도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이리저리 전화를 돌렸다. 빈소에서 나온 또 다른 원로는 장례식장 직원에게 "3일 동안 고생 많았어요"라며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경찰은 조직원들의 동향을 체크하며 무전기로 교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경찰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다.

다음 날 오전 5시30분께 김씨의 빈소가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고인을 보내는 발인예배가 지하 1층 영결식장에서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최성규 인천순복음교회 목사는 이른 시각 아산병원 영결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 6시께 김씨의 영정사진과 함께 유족들이 지하 1층 강당에 도착했다. 김씨의 운구가 영결식장으로 들어가고 '다시 만나자'는 찬송가가 영결식장 주위에 울려 퍼졌다. 강당 밖의 조문객들도 차분한 분위기로 김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오전 6시30분께 발인예배가 끝나자 운구행렬이 영구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350여명의 조문객들은 검은 리무진에 옮겨지는 고인의 관을 보면서 "형님 잘 가쇼"라고 외쳤다. 한 60대 남성은 "이 사람, 생전에 그렇게 멋있는 척을 하더니 먼저 가버렸구만"이라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미리 도착한 45인승 관광버스 12대는 아산병원 장례식장 주변을 메웠다. 병원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던 20대 주먹 2명은 "형님에게 혼나겠다"며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그들이 탄 버스는 앞서 간 리무진을 따라 광주로 향했다.

"형님 잘 가쇼"
한줌 재로 묻혀

오전 12시께 흰 천을 두른 김씨의 시신은 화장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씨를 덮은 흰 천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고 김태촌 집사 천국환송예배'를 끝으로 김씨는 그곳에서 한줌의 재로 잠들었다. 1975년 폭력조직에 몸담은 뒤 어둠의 세계를 호령했던 김씨는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 영원한 어둠 속에 묻혔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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