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은폐 역사적 진실, 정말 청산된 거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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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은폐 역사적 진실, 정말 청산된 거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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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출범…5년간 공식 활동 마무리 
총 1만1175건 신청…75% 8450건 진실 규명

의혹만 남긴 채 묻힌 대형 사건들을 다시 끄집어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숨 가쁘게 달려온 5년 동안의 공식 활동을 마쳤다. 미완의 진실규명으로 기대에 못 미쳤다는 지적도 있지만, 부끄러운 과거사를 청산하고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는 데 상당 부분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실위가 조사한 대표적인 사건들을 정리해봤다.

왜곡·은폐된 과거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목표로 2005년 12월 출범한 진실위는 이듬해 4월부터 진실 규명을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신청된 사건 1만1175건을 모두 처리했다. 이중 진실을 밝힌 사건은 8450건(75.6%), 진실규명을 할 수 없는 사건은 510건(4.7%)으로 집계됐다. 각하는 1729건(15.5%)이다. 진실위가 조사한 희대의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사건1] 박종철 고문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재학중이었던 고 박종철 열사는 제5공화국 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고문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 사건은 6월 항쟁의 불씨가 됐다.

진실위는 2009년 6월 경찰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정부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조직적으로 은폐 조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부가 국가안전기획부, 내무부, 법무부, 청와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사건 은폐·조작은 물론 발표경위와 검찰에서 치안본부로 수사주체가 바뀌는 과정에 개입한 점을 확인한 것.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적절히 행사하지 않고 직무를 유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사체 부검을 통해 사인이 질식사임을 알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외압에 의해 이를 철회하고 수사를 치안본부로 이관했고 추가 공범 3인의 존재를 알면서도 수사를 벌이지 않았다.

진실위는 “검찰은 1987년 5월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추가 공범의 존재가 밝혀진 후 추가 공범 3인과 은폐에 가담한 치안본부 관계자를 기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며 국가가 정권의 필요에 따라 검찰의 수사권을 침해한 점과 검찰이 권력층의 압력에 굴복해 진실왜곡을 방조한 점에 대해 유족에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사건2] 김대중 납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3년 8월8월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됐다. 신병치료차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

도쿄 한민통 결성을 5일 앞두고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팔레스 호텔에 간 그는 신원 미상자들에게 납치됐다가 129시간 만인 8월13일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은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한일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진실위는 2007년 10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따라 중정 주도로 이뤄졌다고 발표했다. 진실위는 “중정 주도 하에 이뤄졌다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됐다”며 “‘이 부장으로부터 직접 구두 지시를 받았다’는 당시 이철희 정보차장보의 진술 내용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1973년 7월10일 김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일본에 재입국하자 이 부장이 이 차장보에게 납치 공작 추진을 지시했다”며 “1973년 7월19일엔 구체적 납치 계획인 이른바 ‘KT 공작 계획’이 중정의 명령 계통을 통해 작성해 보고됐다”고 덧붙였다.

진실위는 관심을 모았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 여부에 대해선 “사전 지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진실위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사건3] 김형욱 살해

박 전 대통령의 가신이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1969년 10월20일 해임된 뒤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유신 선포로 의원직을 상실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박 전 대통령에게 원망을 품은 그는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는데 더 이상 행적은 알 길이 없었다.

김 전 부장의 실종과 관련해 ▲파리 근교에서 살해 후 양계장 분쇄기로 처리 ▲파리에서 살해 후 센 강에 유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실종 ▲서울로 납치 후 청와대 지하실에서 살해 등 각종 설이 난무했다. 그러나 2005년 5월 진실위의 발표는 전혀 달랐다.

진실위에 따르면 김 전 부장이 프랑스로 갈 것이란 정보를 접한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은 주 프랑스 중정 책임자였던 이상열 공사에게 살해를 지시했다. 이 공사는 김 부장으로부터 살해 도구로 받은 소음기가 달린 구소련제 권총과 독침을 중정 연수생에게 건넸다.

연수생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동유럽 출신 2명과 함께 샹젤리제 거리의 리도 극장 앞에서 김 전 부장을 납치, 인적이 드문 파리 외곽의 작은 숲에서 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이들은 시체를 낙엽으로만 덮었고 그가 차고 있던 시계를 센 강에 던졌다. 버버리코트와 벨트는 가위로 잘게 썰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김형욱 살해 사건’에 박 전 대통령의 개입 부분도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위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건4]  KAL 폭파

1987년 11월29일 중동 건설현장에 나갔던 노동자 등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KAL 858기가 버마 상공에서 공중 폭발했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폭파범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은 김현희씨가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다.

김씨는 사고 발생 3년 만인 1990년 3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확정됐으나 특별사면돼 풀려났다. 그는 석방된 뒤 안보 관련 강연과 수기 출간 등 공개적인 활동을 했다. 1997년 12월 자신의 경호를 담당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도 했다.

‘KAL기 폭파 사건’을 두고 북풍을 노린 안기부의 자작극, 사전 인지, 방조 의혹 등이 불거졌지만, 진실위는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진실위는 2007년 10월 KAL기 폭파 사건은 북한이 자행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진실위는 “국가안전기획부는 이 사건이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음에도 범인 김씨의 진술에만 의존한 채 검증 없이 서둘러 발표함으로써 수사결과에 일부 오류가 발생했다”며 “이것이 불필요한 의혹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김씨에 대해 10여 차례에 걸쳐 면담을 요청했지만, 김씨의 거부로 끝내 성사되지 않아 미완의 진실규명이란 평가가 나왔다.

[사건5] 김포공항 폭발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1986년 9월14일 김포공항 국제선 1층 청사밖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의 쓰레기통에서 폭탄이 터져 전송객 부부 등 일가족 4명과 공항관리공단 직원 등 모두 5명이 숨지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참사가 발생했다. 치안당국의 조사 결과 고성능 사제폭탄인 ‘콤포지션4’계열의 폭약과 시한장치가 터진 것으로 드러났다.

사망자들은 쓰레기통 파편에 맞아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사건 전후 김포공항을 출입한 외국인 267명과 국내범행가능자 2만8000여명, 인터폴을 통해 입수한 국제 테러리스트의 입국 여부, 공항 주변 주민 6000여명, 국내 폭발물 제조 판매 및 저장업소 1771곳 등을 조사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오리무중이었던 ‘김포공항 폭발 사건’의 전말도 진실위가 밝혀냈다. 진실위는 북한의 조종을 받은 국제 청부 테러리스트가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했다.

북한이 사주한 테러리스트 조직은 ‘아부 니달’그룹이다. 아부 니달은 1970∼1980년대 활동한 팔레스타인의 테러 지도자로, 아라파트의 온건노선에 반발해 파타혁명평의회란 새로운 조직을 결성한 뒤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 암살 기도, 로마 및 빈 공항 테러 공격 등 90여회의 테러를 감행, 총 9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주요 국가들은 그를 1급 테러리스트로 지목해 추적했고, 아부 니달은 1990년대 이후 은둔생활을 하다가 2002년 8월1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6] 보도연맹 학살

진실위의 가장 큰 성과는 6·25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사살 사건들이다. 수십 건에 이르는 인민군, 좌익 등에 의한 집단희생 사건들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중 ‘울산보도연맹 사건’이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가입자가 30만명에 달했다. 서울 가입자만 2만명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경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 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사상적으로 무관했던 다수의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울산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8월 울주군 온양면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반정고개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보도연맹원 수백명이 집단 총살당한 사건이다. 진실위는 2007년 11월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진실위는 87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고,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407명이었다. 진실위는 “희생자의 47.2%인 192명이 좌익 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고, 불법처형을 저지른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위는 국가의 공식사과 등을 요구했고, 결국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8년 1월 직접 국가를 대표해 공식 사과했다.

[사건7] 언론 통폐합

언론 통폐합은 1980년 11월14일 ‘대한민국 언론의 개혁’이란 명목으로 신문, 방송, 통신사 등 국내 언론매체들을 물리적으로 통제한 사건이다. 이에 따라 중앙지 신문은 7개에서 6개로, 지방지 신문은 14개에서 10개로 줄었다.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해체·통합되면서 연합통신이 설립돼 유일한 통신사가 됐다. 방송에선 동양방송, 동아방송, 전일방송, 서해방송, 한국FM 등을 합병한 한국방송공사를 비롯해 문화방송,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아세아방송 등 5개만 남았다.

진실위는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실위는 2010년 1월 “1980년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사용된 공권력의 구체적인 모습, 구체적인 피해내용이 피해자 진술로 밝혀졌다”며 “이번 조사를 통해 국가권력이 언론을 인위적으로 재편하고 언론인을 해직시키는 것은 더 이상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서 위원회의 진실규명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문서마다 숫자가 달라 해직언론인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1000여명 선”이라고 덧붙였다.

진실위는 “언론통폐합 조치 및 언론인 강제해직, 정기간행물 및 출판사의 등록취소 조치에 대해 공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며 국가에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및 피해구제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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