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1987년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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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은 미제사건> ⑦ 1987년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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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식당 천장에 널린 미스터리 시체들

[일요시사=사회팀] 이광호 기자 = 끊이지 않는 잔혹범죄에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이 각고의 노력을 펼치고 있지만, 전체 사건 중 미제사건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초반으로 유지되거나 오히려 늘고 있다. 미제사건 피해자 가족들은 여전히 지옥 같은 고통을 느낀다. <일요시사>는 서서히 잊혀 진 미스터리 사건들을 재조명 해본다. 그 일곱 번째 이야기는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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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시대는 신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급기야 무고한 사람을 태워죽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이런 암흑의 시대가 지난 후 사람들은 자문했다. ‘누가 그들을 죽였나?’ 사람의 죽음은 두 가지로 나뉜다.
 
자의에 의한 사망인지, 타의에 의한 사망인지 여부다. 그런데 스스로 신변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제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받는 경우에는 자살과 타살 중 어느 것에 해당될까. 물리적 자극이 아닌 ‘동기부여’가 개입될 때, 이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락방 시신들
 
한 시대를 충격에 빠트린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의 시작은 ‘박순자’라는 여성이었다. 이 여성은 횡격막에 병을 앓다 치료를 통해 치유된 것이 ‘신의 은총’이라고 믿었다. 이후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등을 전전하다 마침내 직접 시한부 종말론을 숭상하는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되기에 이른다. 이 사이비종교가 바로 ‘오대양’이었다. 지구를 둘러싼 다섯 개의 대양이라는 의미의 오대양. 박순자는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 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한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발전했다.
 
자신이 만든 종교의 신도를 끌어모으던 박순자는 1984년 공예품을 만드는 회사인 (주)오대양을 설립했다. 박순자를 포함한 종교간부들은 신도들에게 집단 생활을 강요했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또한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인수해 사회사업을 하는 것처럼 꾸몄지만 실상은 약자들에게 교리를 주입시켜 세뇌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박순자는 신도들의 명의를 이용해 대규모 사채를 써 자본을 끌어 모으기도 했다. 또한 대전과 용인 등지의 공장들을 인수해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86년에는 일본의 전자부품 업체와 합작, 7억원을 투자해 전자제품을 만드려 시도했지만 기업 간 대규모 사기를 당하게되면서 재정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울타리 쌓고 왕국 건설하려다…처참한 최후
집단 자살 원인 불명확해…여전히 수수께끼
 
상황이 악화되자 오대양은 신도들을 압박했다. 집단생활 통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부부를 각방을 쓰게하면서 금욕생활을 하게 했고 외출도 2주에 한 번 단체로 하는 것만 허용했다. 오대양은 신도들에게 끊임없이 사채를 강요했고 결과적으로 박순자는 170여억원을 모았다.
 
이후 대출금 상환을 독촉하러 오대양 공장을 찾았던 채권자가 신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오대양을 고소하는 해프닝이 발생한다. 이로써 오대양과 박순자의 사기혐의가 사회적으로 주목받게 됐다. 경찰과 언론의 압박에 박순자는 자신의 가족과 열성신도 31명과 함께 오대양 생산공장의 천장에 숨어 지냈다.
 
87년 8월29일, 오대양 직원이었던 김모씨는 서류전달차 용인의 공장에 들렀다가 숙소 식당의 천장이 내려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수상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알고 보니 천장에는 사람시체가 쌓여있었다. 김모씨는 곧장 박순자의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날 오후 4시경 경찰에 신고하면서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경찰은 시체를 수거하고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현장에서는 사망한 사람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들이 발견됐다.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갔다” “○○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했다”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는 다 헤어지고…”. 메모내용을 봐선 집단 독약 중독사에 무게가 실렸으나 부검결과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신경안정제인 ‘하이드라민’만이 검출됐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목이졸려 죽었다는 것이다.
 
시체 부검과 현장 감식을 통해 경찰이 추측한 경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박순자가 신도들에게 약물을 투여해 혼수상태로 만듦. 둘째, 박순자는 오대양 공장장인 이경수에게 자신을 목졸라 죽이도록 지시. 셋째, 이경수와 남자신도들이 혼수상태인 여자신도들을 목졸라 죽임. 넷째, 남자들은 여자들이 모두 죽었는지 확인, 박순자의 두 아들이 철골에 줄을 매달고 목매어 자살. 다섯째, 이경수는 두 아들이 죽었는지 확인, 목을 매고 자살.
 
“유병언은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박순자와 사이비종교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해프닝으로 경찰은 이들의 사망 사유를 ‘자살’로 결정짓고 수사를 종결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경위로, 왜 집단적인 자살을 택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 오대양 직원 11명은 집중수배되었으나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종료됐다.
 
그리고 4년 뒤인 91년 7월, 사건 당시 수배됐던 오대양 직원 6명이 경찰에 자수했다. 이들을 통해 오대양의 총무였던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이 규율을 어겼단 이유로 신도들에게 암매장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자수내용을 토대로 오대양의 재조사가 추진됐으나 4년전과 마찬가지로 ‘32명의 집단자살’로 결론이 났다.
 
이 사건에 대한 의문점은 세 가지다.
 
경찰 추측에 의하면 이경수는 가장 마지막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그러나 시체 발견 당시 이경수는 무릎을 꿇은 채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목이 매달려 죽어있었다. 이경수의 발 밑에는 갑판이 있어 체중으로 목을 지탱할 수 없었으므로 자살이 힘들다는 것이다.
 
둘째, 여자 시체. 국과수 검사결과 여자 신도들의 시체에서 정액 양성반응이 나타났다. 부검의는 국과수의 검사가 오류라고 반박했다.
 
셋재, 5공 특위. 당시 사건은 6월 항쟁 이후 발생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자살 아닌 타살?
 
오대양의 채권자는 270명이었고, 이들에 의해서 5공 특위에 오대양 사건을 조사해달라며 국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렸으나 무산됐다. 때문에 언론에 의한 오보, 과장보도가 잦았고 이것이 정치적으로도 이용됐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수사당국은 오대양이 갖고 있던 거액의 금액이 ‘구원파’로 흘러 들어갔던 것으로 보고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관련인물로 지목해 조사했다. 이에 유 전 회장은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91년 8월 구원파 신도들에게 거액을 빌린 뒤 갚지 않은 혐의로 징역 4년을 살았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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