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3)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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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3)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 <고린도후서 6:14~7:1>

오늘 주제는 거룩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하시는 거룩은 무엇인가요? 성경에 나오는 거룩의 뜻을 풀어보면, 구약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로는 카도쉬라고 하고,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로는 하기오스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의 뜻은 모두 “잘라내다. 분리하다. 구별하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분리, 구별됨”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몇 번 말씀드렸죠.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뜻은 밖으로 불러내다. 세상에 속한 자들을 구별하여서 분리해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하지만 거룩은 구별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서 분리되는 것만으로 거룩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주님과 연합을 이루어야 거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불리우는 것은 주님과의 연합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 끝인가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인 로완 윌리암스는 거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의 거룩함은 쓰레기와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 본성 한가운데로 예수께서 뚫고 들어오는 일이다. 예수님에게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참여하는 일을 뜻한다.” 


정리하면 거룩이란 세속적인 것과의 분리, 주님과의 연합, 그리고 세상속으로 참여를 통한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거룩함의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4절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이어지는 말씀도 보십시오. 몇 가지를 대조적으로 설명하죠.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서로 상반대는 관계,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데, 이는 한 마디로 거룩과 세속의 대립을 뜻합니다. 

 

왜 이런 말씀이 주어졌는가? 오늘 말씀이 주어진 곳이 고린도라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고린도는 지역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한 번 황폐해졌던 곳입니다. 아예 도시 자체가 사라졌다가, 한 100년이 지나서 재건된 도시입니다.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강제적인 이주가 이루어져서 마구잡이로 사람들이 모여들다보니, 짧은 시간에 도시는 커졌으나 사회 질서 자체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향략적인 삶이 난무합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우상의 신전들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은 시작하였으나, 환경적인 요소로 인하여 거룩함을 지켜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바울이 권고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도로 부름을 받았으니, 주어진 환경적인 현실로 인해 넘어지지 말고, 거룩함을 잘 지켜가야 한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그야말로 한 발은 교회에 들여놓고, 한 발은 세상에 들여놓고 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비판들이 많죠.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언제까지 교회와 세상에 한 발씩 걸치고 살아갈 것이냐?” 이렇게 책망조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더 나갔습니다. “제발 한 발만이라도 교회에 걸치고 있어라.” 예전에는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걸쳤는데, 지금은 아예 두 발 다 세상에 놓고, 교회는 그냥 잠깐 얼굴만 비치는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발은 바라지도 않으니, 한 발만이라도 걸치고 있어라.” 이렇게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거룩은 서론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구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구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의와 불법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벨리알은 악마인데, 그리스도와 악마는 당연히 함께 할 수 없죠.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함께 하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가요? 혹 내 마음에도 하나님의 성전된 내가 품어서는 안되는 것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요? 내 삶에도 하나님의 성전된 나 자신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말 그대로 성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성도라는 그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거룩한 마음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6절 중반에 보면 바울은 구약 성경 레위기의 말씀을 인용하며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핵심적인 언약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중에 처음 주신 말씀입니다. 특별히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켜서 계속 반복적으로 이런 호칭으로 불러주십니다. “내 백성” 그리고 레위기에 출애굽한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오늘 16절에 인용된 말씀이죠. 


이어서 두 번째 인용된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이 주어진 배경은 언제인가요? 바벨론 포로생활입니다.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시점의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의 압제를 당하던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더 이상 바벨론의 종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에 말씀하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혈통이나 육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혈통이나 육정을 따지면 이스라엘 백성들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가 되심으로,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우리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이 무엇인가요? 이어지는 17절과 18절에 말씀하죠.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이어서 말씀하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하나님과 가족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까지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그러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감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의 구별됨을 넘어서 이제는 우리 주님과 깊은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의 자녀로서, 주의 백성으로서 우리 주님과 영적으로나 삶적으로나 친밀하게 연합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날마다 온전한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7장 1절에 결론과도 같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온전한 거룩함,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한 거룩함은 사실 이 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마지막 단계가 “영화”인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의 회복입니다. 이는 저 하늘나라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인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은 무엇인가요? 끊임없는 거룩함을 향한 열망이요, 사모함이요, 도전입니다. 우리의 구원 받은 자로서의 모든 삶을 가르켜서 “성화”라고 합니다. 거룩해져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성화는 일평생 숙제와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너무 조급해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날마다 온전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한 거룩함이 지금 당장 나의 삶에 불가능할지라도 항상 도전해야 합니다. 항상 완전함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상담가들은 알콜 중독자에게 “이제 음주량을 조금만 줄이세요. 저녁에 한잔씩만 마시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판사는 절도범에게 “주말에만 도둑질하는 것이 어떨까요? 100불 이하의 물건만 훔치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 거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협 없는 도전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위에 굳건히 서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리라.” “항상 스스로를 쳐서 복종케 함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리라.” 온전한 거룩함을 향한 도전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변화를 이루게 되고, 그것이 점점 쌓여져 날마다 날마다 온전함을 향해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부족한 점, 지금 제일 연약한 점, 그것이 성품이든, 그것이 말투든, 그것이 헌신과 봉사의 영역이든, 그것이 기도생활에 관한 것이든, 그 부족한 점을 고쳐가면 또 다른 연약함이 보입니다. 그것도 좀 고쳐가다보면 또 다른 부족함이 보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여정에 함께 서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세속적인 것과의 구별됨, 그리고 우리 주님과의 깊은 연합을 넘어, 세상 속에 참여를 통한 변화를 이루어가는, 이를 통해 날마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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