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일상톡톡; 기다려 주지 않는다

교민뉴스


 

백동흠의 일상톡톡;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일요시사 0 28 0 0

아픈 사람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언제 떠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났을 때, 마음이 움직였을 때 바로 찾아뵈어야 한다.

“아니, 어떡해요. 임기봉 선생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꼿꼿하시던 분이었다.

올해 아흔셋.

나는 속으로 ‘이분은 100 세까지는 거뜬하시겠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꼭 일주일 만에

임 선생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그 일주일 사이,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밀린 일 좀 정리하고 병원에 가야지” 하고 미뤘다.

막상 병원에 병문안 가려고 확인했을 때는

“소식 들으신 그날 바로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양털 같은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 사이에서

임 선생님이 “괜찮다”며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았다.

아픈 사람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임 선생님은 내가 운영했던 수필문학 강좌에서 만난 어르신이다.

작년 4월부터, 글렌필드 도서관에서 네 달 동안 수필 강좌를 진행했을 때

가장 연로한 수강생이셨다.

말씀은 언제나 단정했고, 태도는 반듯했다.

수필을 공부하게 된 이유와 앞으로의 바람을

A4 한 장에 손 글씨로 써 오셨는데,

다른 분들이 모두 컴퓨터로 출력해 온 가운데

그분의 글씨만이 품격있게 빛나고 있었다.

붓글씨처럼 또박또박, 성품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순간, 나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강의를 듣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마지막 강의를 앞두고

임 선생님은 옆에 앉은 자매님께 50달러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이걸로 맛있는 거 사서 다음 시간에 같이 드세요.

나는 그날은 약속이 있어서 못 나옵니다.”

그 말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작년 10월, 임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버켄헤드하이베리에 있는 베이징덕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약속 시간에 도착하니

이미 음식은 주문되어 있었다.

그날 임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수필 수업을 듣고 나서

내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나는데

막상 쓰려니 잘 안 되네요.”

강좌 시간에 내가

‘말하기보다 보여주기로 쓰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아 있는데, 그게 어렵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아주 쉽게 묘사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

눈에 선하게 보이도록 쓰시면 된다고.

그 사이 테이블에는

훈제 베이징덕과 각종 소스, 채소가 가득 차려졌다.

노릇하게 구워진 오리고기가 참 먹음직스러웠다.

임 선생님은 접시를 내 쪽으로 밀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가 약해서 많이 못 먹어요.

일하는 젊을 때 잘 드세요.

아흔 넘으니까 먹고 싶어도 조금밖에 못 먹겠더라고요.”

나는 말없이 오리고기를 양배추에 싸서 한입 가득 넣었다.

볼이 터질 듯했지만,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 차마 젓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그날 들은 임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는

내 가슴에 오래 남았다.

한국에서의 삶, 이민 와서의 세월,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까지.

“이제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선생님, 거창하게 쓰실 필요 없어요.

가슴에 남는 이야기 열 가지만 골라서

한 편에 한 장씩만 그림 그리듯 써보세요.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요.

그 자체로 정리가 되고 치유가 됩니다.”

아이들 손에 쥐여줄

얇은 소책자 하나만 남겨도

그건 이미 충분한 기록이라고.

그 말을 들은 임 선생님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그럼 한번 써볼게요.”

그게, 마지막 약속이 될 줄은 몰랐다.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달려가 손 한 번만 잡아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 생각이 오래 남는다.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여유 생기면.”

“이 일만 끝나고 나서.”

하지만 아픈 사람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도, 마음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올해를 돌아보니

나와 비슷한 연배의 많은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때 함께 오래 운전했던 동료,

같은 길을 오가던 사람들,

신앙 안에서 함께하던 분들까지.

이제야 알겠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연락 한 통,

차 한 잔,

잠깐의 방문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루지 말 일이다.

마음이 움직일 때,

지금 바로 안부를 묻고

지금 바로 손을 잡아야 한다.

아픈 사람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사람도, 인연도 마찬가지다.

그분들의 영혼이 영원한 인식을 갖길 빌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사이로 해가 가만히 숨는다.

그 너머에서

임 선생님이 미소 짓고 계시기를

조용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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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백동흠 
수필 등단: 2015년 에세이문학. 수필집: 아내의 뜰(2021년). Heavens 지금여기(2022년). 수상: 2017년 제 19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대상 (깬니프!). 2022년 제 40회 현대수필문학상 (Heavens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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