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0 ; 플렁켓 설립자 - 트러비 킹 (Truby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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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0 ; 플렁켓 설립자 - 트러비 킹 (Truby King)

일요시사 0 149 0 0

<1858년 4월 1일~1938년 2월 10일>




엄마에게는 도움을, 갓난아이에게는 생명을 


트러비 킹은 수많은 산모와 젖먹이가 더 나은 의료혜택을 받게 하고 

1938년 2월 10일 여든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뉴질랜드 우표에 사람 얼굴을 넣기로 한 1957년 많은 사람은 그의 얼굴을 첫 번째로 떠올렸다. 

트러비 킹은 키위들이 오랫동안 기념하고 싶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플렁켓(Plunket)은 뉴질랜드가 자랑하는 비영리 민간 의료단체 가운데 하나다. 전국에 약 600곳이 흩어져 있다. 일반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퇴원하면 집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플렁켓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점검하는 게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키위 90%가 어떤 모양으로든 혜택을 본다. 이 단체를 만든 사람이 트러비 킹이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 모습 보여줘

 

트러비 킹은 1858년 4월 1일 뉴플리머스(New Plymouth, 북섬 타라나키 중심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타라나키(Taranaki, 뉴플리머스의 마오리 이름)에서 은행가이며 정치인으로 일했다. 아버지를 따라 은행가로 클 생각을 품고 있었던 트러비 킹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홈 스쿨링(Home Schooling, 재택 교육)과 개인교습으로 여러 지식을 쌓은 킹은 오클랜드와 웰링턴, 마스터턴(Masterton, 북섬 남쪽 끝에 있는 도시) 같은 큰 도시를 여행하면서 진로를 의학 쪽으로 바꿨다. 

 

1880년 스물두 살 때 영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에든버러대학(University of Edinburgh,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에 있는 종합대학, 1582년 설립)에서 그해 가장 훌륭한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보여준 천재성은 ‘영국의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에든버러대학에서도 빛났다. 공부를 마치고 에든버러와 글래스고(Glasgow,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 왕립진료소에서 근무했다.

 

유학생활을 끝내고 뉴질랜드로 돌아온 트러비 킹은 웰링턴 병원 책임자로 일하다가 더니든에 있는 정신 질환자 수용소 일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총독 부인 이름 따 ‘플렁켓’으로 결정 

 

정신병 환자 수용소(Seacliff Lunatic Asylum)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트러비 킹은 큰 관심이 없던 산모와 젖먹이 의료에 마음을 쏟았다. 사람들은 그를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눈을 지닌 사람이라는 평이었다.

 

1907년 5월 14일 트러비 킹은 더니든 시청 강당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이날을 기점으로 뜻있는 많은 키위가 그를 짜임새 있게 도울 방법을 찾았다. 

 

트러비 킹의 꿈에 큰 힘을 실어준 사람은 총독 부인 빅토리아 플렁켓(Victoria Plunket)이었다. 아들딸을 여덟이나 두었던 플렁켓 여사는 트러비 킹이 마음속에 품은 ‘엄마들에게는 도움을, 아이들에게는 생명을’이라는 목표를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트러비 킹은 총독 부인 성을 딴 ‘플렁켓’이라는 성(姓)이 뉴질랜드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했다.


 플렁켓 여사를 비롯해 명망 있는 부인들이 이 일에 함께하면서 사업은 점차 활기를 띠었다. 산모들에게 모유 먹일 것을 장려하고 간호사를 통해 산모와 젖먹이의 건강을 돌봐줬다. 플렁켓에서 교육을 받은 부모들이 집안 위생에 좀 더 애를 쓰자는 운동을 벌였다.

 


영국 찾아가 젖먹이 건강 중요성 외쳐

 

트러비 킹은 명연설가였다. 그는 여러 도표와 정확한 수치를 보여주면서 산모와 젖먹이의 영양 상태가 얼마만큼 좋아졌는지를 설명했다. 모든 형편이 예전과 견주어 볼 때 나아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트러비 킹은 뉴질랜드 어머니들 사이에서 유명 인물이 됐다. 산모들은 더 좋은 환경과 조건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확신을 하게 됐고, 몸을 사리지 않고 애쓰는 그를 맘껏 도와주었다. 

 

밤에만 엄마 젖을 먹일 것이 아니라 낮에도 4시간 간격으로 먹여야 하며, 태어나고 보름 뒤부터는 시간에 맞춰 용변을 보게 해야 한다는 것도 트러비 킹 덕분에 모두 알게 된 지식이었다. 젖먹이에게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해야 하며, 너무 심하게 갓난아이를 안아주면 좋지 않다는 점도 알게 됐다.

 

트러비 킹의 사업은 유럽까지 확대됐다. 1912년 그는 영국을 찾아가 젖먹이 건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 의료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 결과 영국에서도 플렁켓과 비슷한 머더크래프트 트레이닝 센터(Mothercraft Training Centre)가 생겼다. 산모와 젖먹이의 의료체계를 영국에 수출한 셈이었다.

 

1913년 트러비 킹은 《Feeding and Care of Baby》(갓난아이 돌보기와 먹이기)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뉴질랜드 산모 사이에 가장 좋은 육아 책으로 꼽혔다. 폴란드 러시아 스페인 말로도 번역돼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또 2년 뒤에 나온 《Expectant Mother》(예비 엄마)와 《Baby’s First Month》(갓난아이의 첫 달)는 정부로부터 결혼증명서를 발급받기 전 꼭 읽어야 할 책이었다.



민간인 최초 국장(國葬)으로 치러 

 

트러비 킹은 산모와 젖먹이의 의료환경이 나아지게 하는 데 평생을 다 바쳤지만 정작 자신은 한평생을 결핵으로 고생했다. 그 결과 삶의 마지막 무렵에는 눈 한쪽을 잃는 불행을 겪었다. 

 

트러비 킹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성격이 괴팍하고, 자기 맘에 들게만 일을 해왔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트러비 킹은 플렁켓을 뉴질랜드에서 꼭 필요한 비영리단체로 만들려고 애쓰다가 자기 뜻과 다르게 사람의 흠을 보였다. 

 

하지만 뉴질랜드 역사는 한 개인의 과(過)보다는 서민에게 끼친 공(功)을 더 높이 평가한다. 과 없는 완벽한 공이 없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1921년 현직에서 물러난 트러비 킹은 4년 뒤인 1925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트러비 킹은 수많은 산모와 젖먹이가 더 나은 의료혜택을 받게 하고 1938년 2월 10일 여든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뉴질랜드 우표에 사람 얼굴을 넣기로 한 1957년 많은 사람은 그의 얼굴을 첫 번째로 떠올렸다. 트러비 킹은 키위들이 오랫동안 기념하고 싶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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