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6) 비워진 무덤, 가득 찬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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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6) 비워진 무덤, 가득 찬 은혜 <마태복음 28:1~10>

일요시사 0 183 0 0

기독교의 가장 큰 자랑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영상을 통해서 보신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그날은 슬픔의 날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사,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언제 일어났나요?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일주일의 첫 번째 날인 주일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일주일의 첫날, 그보다 완전을 뜻하는 일곱째 날을 지나 여덟째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숫자 8은 초월을 뜻하고, 부활의 수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바위를 뚫어서 만든 무덤입니다. 이러한 바위 무덤은 당시 상당히 부유한 사람들의 무덤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발라드리고자 무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마주한 것은 빈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며, 한바탕 울고 올 것을 생각했는데, 오히려 크고 놀라운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워졌지만, 대신 은혜로 가득찼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워졌기에, 그 자리에 찾아간 이들은 충만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워진 무덤에 가득 찬 은혜. 그 은혜가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똑같은 예수님의 기사임에도 조금씩 차이가 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 사건을 바라본 사람의 관점, 기록한 사람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복음서에 한결같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처음 마주한 이들이여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복음서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상당히 흔한 이름입니다. 그중에서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데, 일곱 귀신이 들렸으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를 경험한 여인입니다. 이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도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주일에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을 처음 맞이하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은혜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거저 주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삶 속에 은혜에 합당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고침을 받고 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따라나섰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사 숨을 거두시는 그 슬픔의 현장까지도 함께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고, 모든 복음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마리아와 더불어, 본문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또 한 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누린 이가 있습니다.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이 자체로도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고, 공회원으로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룬 것은 공회원 자격 박탈, 또는 출교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 큰 은혜를 담아 주십니다.  예수님의 무덤 뒤쪽으로 요셉의 무덤이 세워졌습니다.각종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내어드린 아리마대 요셉에게 임한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아리마대 요셉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아 누렸습니다. 우리도 이미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천년전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역사가 되었기에, 우리 역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나를 향한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주의 은혜로 가득차게 된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말씀대로 이루시는 은혜입니다. 


지난 사순절 기간에, 주일마다 제가 마태복음의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들, 그 안에 담겨진 예수님의 행적, 그리고 십자가 부활까지의 모든 말씀은 단순히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만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들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부활의 역사는 구약에 이미 기록된 말씀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이미 앞서 예수님께서 여러차례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신앙의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러한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날 것이다.” 이미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제자들은 막아서고 싶어했습니다. 군중들 역시 예수님을 죽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꾸 죽으신다고 말씀하시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저들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잡히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호산나 환영하던 무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쳐댔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다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건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의 가장 큰 성취가 이 아침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냅니다. 계속해서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예수님은 이미 여러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다시 사심”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의 생각은 “죽으심”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게 당연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죽음이 끝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 다시 말해 죽음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다시 사심을 통해 다시 한 번 이루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전적인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 불가능한 생명의 역사, 영생의 기쁨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의 놀라운 은혜를 내 삶에도 체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평안으로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예전에 사순절 기간에 많이 보았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처음에 한국에서 상영을 할 때에, 반대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반대했을까요? 기독교 단체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 참혹하게 그렸다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상으로 보면 차마 보기 힘든 마음이 막 들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도 들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심한 모습에 거의 혐오감까지도 들 수 있거든요. 하지만 실제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은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그 실제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생하게 지켜본 여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요? 그럼에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저들이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에게 기쁨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속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또 한편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알리고자 달음질하는데, 그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 제자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십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평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삶에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뒤에 작은 나뭇조각 하나를 물 위에 띄우고 어깨에 메고 갑니다.  프란체스코가 묻습니다. “왜 물통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갑니까?” “나뭇조각을 하나 띄어두면, 물통이 흔들려도 물이 넘치지 않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여기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래.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나고, 마음이 요동칠 때,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려움의 상징이었지만,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두려움으로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띄어질 때에, 우리는 참된 평안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평안으로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과 늘 함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주님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또한 내 걸음이 닿는 곳에 주의 평화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덤은 비워졌지만, 은혜는 가득 찼습니다. 무덤이 비워졌기에 은혜가 가득찰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 우리 마음 속에 가득 채우고, 누리고, 또한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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