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주일설교(327)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 로마서 8; 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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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주일설교(327)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 로마서 8; 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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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발 뒤꿈치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부분을 가르켜 아킬레스건이라고 합니다.

아킬레스건은 치명적인 약점이란 뜻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아킬레스건이있습니다.

 실제로 내 발 뒤꿈치에 아킬레스건이 있고, 저마다 가진 약점들이 있습니다. 모두 다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다 각자의 삶의 무게들이 있고, 감추어진 연약함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께서 도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지난 2천여년 교회의 역사에는 끊임없는 박해와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살아가는 삶 자체에도 위기의 연속입니다.

 내 신앙의 삶도, 우리 가정의 모습도, 사업장과 직장을 비롯한 삶의 터전도,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하고 평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또 우리가 예배하는 것, 기도하며 힘을 내는 것, 내 삶의 자리에서 열심 다해 살아가는 것,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 이 시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기대함으로 예배하는,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26절에 우리의 첫 번째 연약함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가 새벽마다 시편의 말씀을 보고 있는데, 근래에 보고 있는 시편은 비탄시입니다. 비탄시는 한마디로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담긴 시입니다. 다윗의 삶에 얼마나 많은 위기가 있었나요? 그 모든 위기의 순간에 다윗은 늘 기도합니다.실제 그의 삶에는 언제나 기도가 먼저였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요? 기도한다고 과연 이게 해결될까? 믿음이 연약하여 기도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삶은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니까, 아예 기도할 생각조차 못하는 초보적인 신앙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뭐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주심을 말씀합니다.

그럼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든 그래도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단 기도의 무릎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일단 기도의 마음을 품는 겁니다. 임은미선교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선교보고 영상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유니~~스!” 선교사의 이름을 아이들이 그냥 막 부릅니다. 아이들은 선교사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반가워서 이름만 부르는 거예요. 그럼 이 선교사는 다 압니다. “얘네들 신발이 없는데, 신발을 사주면 좋겠다.” 또 “유니~~스” 이렇게 부르면, “쟤네들, 하루 한끼밖에 못 먹는데, 어떻게 하면 두끼 정도 먹일 수 있을까?” 그러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심이 이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마음을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삶에 필요를 따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시사,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합당한 은혜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여러분이 계획하고 꿈꾸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지고, 그에 합당한 삶이 열려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의 근거가 본문 28절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일들이 선함을 목적으로 함께 합력하여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길을 떠올릴 때 계획대로 잘 풀려지는 것을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하지만 하나님의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은 그런 세상적인 판단기준의 차원만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 보면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뭐라고 말하나요? 욥기 2장 10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다 좋을수만은 없다는 거예요. 욥의 고백은 여기서 끝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지나온 욥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시고, 욥은 더 큰 믿음의 성숙을 고백합니다. 결국에 선한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신다는 것은 지금 당장 모든 게 다 잘 풀린다는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완성해가는 것, 그게 바로 합력하여 선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 당장의 일들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한다면, 오늘도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음을 느끼며, 믿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속에서 나의 삶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 가족도, 함께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동역자들도, 때로 나를 힘겹게 만들고 가슴 아프게 만드는 그 모든 사람과 상황을 통해서도 결국에는 선을 이루어가시는 주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순간 속에서, 이 모든 삶의 자리 가운데서, 오늘도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시는 주의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선은 무엇일까요? 신앙인으로서 나의 삶에 가장 최고의 선은 성령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29절과 30절 말씀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설명하고자 하면, 예정설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려야 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예정설을 주장합니다. 예정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구원의 선택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칼뱅은 이중예정설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까지 다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감리교회에서는 예지예정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 이 사람이 구원의 길을 가게 될지, 사망의 길을 가게 될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면 뭐가 맞는가? 답은 모릅니다.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속단하여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나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곧 성령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제 구원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부름받아 주의 십자가 앞에 선 우리들이 믿음의 고백을 드릴 때에, 칭의 -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이후로 우리의 모든 삶은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삶, 즉 성화의 삶입니다. 그리고 성화의 완성, 마지막 단계가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본래 영화란 육체를 벗어나 완전한 죄사함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죄된 우리의 삶에 이루어질 수는 없죠. 그래서 본문의 영화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은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셨음의 증거가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내 삶에 영광스러운 변화가 이루어지고,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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