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53); 그리스도인의지혜로운 삶 <에베소서 5:15~21>

할렐루야!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입니다.지혜라는 것은 지식의 차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에, 어떤 일이 있어서 담임목사님께 질문을 하면, 그런 답을 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지혜롭게 해봐요.”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저도 때로 우리전도사님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지혜롭게 해봐요.” 교회에서 뭔가 일을 할 때에, 무 자르듯이 정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저런 상황,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관계와 상황이 같이 엮여 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이런 걸 다 이야기해준 다음에 말합니다. “자 이제 전도사님이 지혜롭게 해봐요.”지식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쉽습니다. 요리를 해도 한 스푼, 두 스푼, 8분, 10분, 이렇게레시피대로 하면 쉽습니다. 그런데 음식 잘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설탕 적당히 넣고, 소금도 적당히 넣고, 적당히 끓으면 야채를 적당히 넣고... 도대체 이적당히가얼마냔 말입니다. 삶에 있어서 “지혜롭게”라는 말과요리 할 때 “적당히”라는 말은 거의 막상막하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지혜에 관한 말씀입니다. 15절에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맨 앞에 “그런즉”이라는 말로 시작하죠. 그런즉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본문 앞에 있는 내용을 살펴봐야합니다. 앞에 있는 중심주제는 한 마디로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처럼 행하라. 우상을 따라가거나, 헛된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성도로서 바른 삶을 살아가라. 이전에는 어둠 속에 행하였어도 이제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라. 그리스도의 빛이 너희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해야할지를 잘 배웠으니, 이제 주의 빛 가운데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라.” 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은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시간 속에 의미를 새겨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 영적 의미를 새겨가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지혜로운 삶의 첫 번째 권고가 나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자,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시간낭비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또는 이제 2025년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는데, “세월 참 빠르구나.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면서 지냈나? 너무 허송세월 한 것은 아닌가? 세월을 아껴야지.”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세월을 아끼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나가는 모든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댓가를 치러서라도 사와서 그 시간을 내것으로 만들라.” 그런 뜻입니다. 그게 곧 시간 속에 의미를 새겨가는 것입니다. 여러 번 들어보셨죠.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의 개념은 헬라어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주어진 시간 속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지는 순간이고, 크로노스의 시간은 “지금 현재 시각 오전 9시 28분..”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본문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세월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뜻합니다. 이어서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로 ‘엑사고라조’라고 하고, 영어로 하면 ‘reedeem’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속량하다. 사다. 구원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속량은 값을 치루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값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량으로 죄의 종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끼라”는 말에 속량과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다시 풀어보면, 처음 말씀드린대로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 네 안에 새기라.”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은 택함 받은 자라도 할 수만 있거든 미혹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내 믿음을 잘 지켜가기 위해서는,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댓가를 지불하고 사서라도, 그 안에 영적 의미를 새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악한 세대속에 나를 붙잡아줄 힘이 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속 썩이고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화가 나서 다 쫓아내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어렸을 적에 그렇게 이뻤던 때가 생각납니다. 시간 속에 새겨진 의미들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억이 다시금 자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회복시켜 줍니다.신앙의 삶도 그렇습니다. 때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렵고, 낙심하는 마음이 들고, 시험에 들기고 하고, 누구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신앙을 놓아버릴까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기도하는 중에, 예전에 은혜 충만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거예요.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찬양하면 힘이 나고, 주의 도우심으로 사명 감당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게 나를 다시 일으킬 힘이 됩니다.그 모든과거의기억들이그냥지나가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금떠올라나를웃게만들고, 나를다시일으켜세우고, 새롭게도전하게합니다.우리가 지금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데, 지난 주에 제가 말씀드렸죠. “대림절 기간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대림절 4주간의 크로노스의 시간은 지금도 흘러갑니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영적 의미들을 새겨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입니다.오늘도 예배를 통해, 모든 헌신된 귀한 삶을 통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새로운 영적 의미들을 새겨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두 가지를 말씀하죠. 하나는 “술 취하지 말라”. 또 하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두 가지이지만 결국에는 하나입니다. “어떤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가?”어떤 알콜중독자의 글입니다. “술에 취하여 수첩에 무언가를 써 놓았다. 나중에 술이 깨었을 때에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술을 세병쯤 마시고 수첩을 보았더니,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말자.’라고 써 있는 글씨가 보였다.” 이 사람은 술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하지만 오늘 바울은 권고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이를 위해 술에 취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본문에서는 술에 취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지만,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술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믿는 자와 늘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그럼에도 충만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하심, 그 차이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뭔가요? 성령으로 충만하면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충만하지 못할 때에는 이런 저런 다른 것들이 자꾸 틈을 타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유혹들이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아예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늘 충만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감사가 충만하면 불평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시기와 질투가 밀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슬픔과 낙심이 뚫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오늘 본문에 술취함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수많은 헛된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강림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데, 사실 기도하기만 한 게 아니죠. 숨어 있기도 한 겁니다. 그런데 오순절날에 성령강림의 역사가 임합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랬더니 즉시로 거리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합니다.그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니까, 헛된 것들이 자리하고 있을 공간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말하는 게 달라집니다. 바라보는 게 달라지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몇 번이나 말씀드렸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삶에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변화가 내 의지로 되던가요? 내 생각만 가지고 되던가요?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세상의 헛된 것을 멀리해야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세상의 헛된 것에 취하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초월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늘 말씀드리는 게 있죠. 저의 신앙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확고하면 어지간한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말씀과 기도 위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 영적인 담대함이요, 예수 믿는 자로서의 자긍심입니다. 기본 바탕이 든든하면 어지간한 시험과 문제와 환란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거든요. 여러분! 환난이 없는 게 아닙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요동하는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과 같은 시험, 불과 같은 어려움을 다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시험과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를 향한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가는 것, 이게 바로 초월입니다.
본문 19절에도 말씀하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는 앞서 18절에 나온 성령 충만함의 결과입니다.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함께 주를 찬송하게 됩니다.20절과 21절도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범사에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저 되어지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즐겁고 기쁘고 잘 될 때만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라, 어려워도 힘겨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가 넘쳐납니다. 초월적인 감사입니다.또한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사랑의 섬김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배려하고 섬기고 인정해주고 수용해주는, 그야말로 하나님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주님 안에 한 형제 한 자매가 되었기에 서로 복종할 수 있습니다. 초월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지금 대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영접하는 자에게는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초월적인 은혜도 베풀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생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을 깨달았으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기쁨이 내 안에서 솟아나야 합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월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의 삶은 힘든 것이 많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가정적인 문제도 있고,속끓이는 자녀손들도 있고,사람들과의 관계도 녹녹치 않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있어서는 한 해 또 나이가들어감이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언제고 같이 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자로서의 반응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런 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초월적인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주어진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기쁨을 누리며, 아니 초월적인 기쁨이 자연스럽게 누려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 또한 누림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