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일상톡톡; 뉴질랜드에서 보는 'King’s Warden' (왕과 사는 남자)

교민뉴스


 

백동흠의 일상톡톡; 뉴질랜드에서 보는 'King’s Warden' (왕과 사는 남자)

일요시사 0 9 0 0

왕이 아닌 ‘사람’을 만나다

Hoyts Wairau Park에서 

비운의 왕 단종과 광천골 촌장 엄흥도


지금과 여기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3월은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숨결이

교차하는 투명한 계절

와이라우호이츠 영화관을 나오는데

오클랜드의 밤하늘이 유독 시립다

하늘 위로 회색 구름이 흘러갔다

방금 본 영화 속 청령포의 강물이 겹쳐 보였다

영화관 가로등 아래 앞 벤치에

두 남성 시니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팝콘 봉지는 비었지만

가슴은 무언가로 가득 차서

한동안 말이 없던 밤이었다

“자네, 눈가가 좀 붉구먼 그래”

여기(Here)가 티슈를 건네며 슬쩍 말을 건넸다

“허허, 오클랜드 바람이 좀 차서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야, 바람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소리 때문인가봐”

지금(Now)이 안경을 닦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1,000만 관객이 울었다더니

뉴질랜드에서 보는 ‘King’s Warden’은 또 다른 느낌이야”


왕관을 벗고 ‘사람’이 된 17세 소년 단종

“나 요즘 말이야”

지금이 주차장 쪽 소나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생 후반전, 이 먼 뉴질랜드에 와서 살면서

내가 왕년엔 뭐였네, 한국에선 어땠네 하는 말들

그게 참 덧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야” 

여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우리 시니어들 모이면 다들 ‘왕년’의 왕들이었잖아”

“오늘 영화 속 단종, 박지훈이 연기한 그 어린 왕을 보니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고

유배지에서 신분이 무너진 뒤에 내뱉은 그 한마디

‘이곳에서 나는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닙니다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그 말이 내 가슴을 툭 치더라고”

“맞아, 그 장면” 

여기가 안타까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료에도 없는 빈칸을 

장항준 감독이 상상력으로 채웠다는데

그게 오히려 더 진짜 역사처럼 느껴지더군

권력을 잃은 게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찾기 시작한 거니까”

지금이 그 장면을 생각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우리 뉴질랜드 이민 생활이나 은퇴 생활도 비슷하잖아

한국에서의 직함 다 떼고, 여기서 그냥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이니까”


촌장 엄흥도와 왕의 동행

“그래서 유해진 씨가 연기한 엄흥도를 보고 많이 배웠지” 

지금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그저 유배객을 돌보는 보수주인이었는데

나중엔 단종을 위해 목숨을 걸잖아

역사에는 시신을 거뒀다는 기록뿐이라지만

영화 속 그 두 사람의 유대는 정말 마법 같았어”

“그래서 자네는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나?”

여기가 궁금증에 채근하듯 물었다

“마지막 강을 건널 때 말이야”

지금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유해진 씨가 ‘이제는 압니다. 

왜 하늘이 나를 이승에 머물게 했는지’

하고 고백하는 그 대목

단종이 왕이라서가 아니라,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구원했다는 게 느껴졌거든”

“허허허,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던 촌장의 마음이

꼭 우리네 시니어 마음 같더라고.”

지금이 공감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여기도 덩달아 기분이 먹먹한 듯 말했다

“촘촘한 서사와 숨 멎을 듯 몰아붙이는 반전

그리고 간간이 터뜨리는 코믹 상황까지

눈물을 끊임없이 빼앗아 가더구먼“


당신은 ‘누구’와 살고 있나요?

지금이 양 손가락 열 개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거기서 멈췄으면 이 영화가 1,000만을 못 넘었겠지”

여기가 다음 말을 기대하며 덧붙였다

“맞아, 지금 자네는 역시 통찰력이 좋아”

지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단종은 왕좌로 돌아가지 못했지

역사적 운명을 거스를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았던 건

그 곁에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해 주는

엄흥도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지”

어느 날엔가 우리 손주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지.

“할아버지, 살아오시면서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럼 나는 그냥 이 영화 속 단종처럼 웃어줄거야

“아니, 할아버지는 그냥 사람이야

네가 사랑해 주는 할아버지, 그거면 고맙지”

지금이 여유롭게 말했다

“권력이 아니라 관계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

그게 ‘왕과 사는 남자’가 우리 시니어들에게 주는

진짜 위로인 것 같더라고”

진정한 사람은, 끝까지 사람으로 남는 법

여기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자네 참 영화 제대로 봤네

나이 먹었다고 과거의 영광만 씹고 사는 게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뉴질랜드에서

누구와 마음을 나누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겠지”

지금과 여기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와이라우호이츠 영화관 위로

구름이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있잖아, 우리 지난번 말한 거,

행복은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과의

차 한 잔에서 나오는 거라고”

지금이 천천히 말했다

“이제 와서 깨닫는 건데,

인생의 엔딩 자막에 남는 건

내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누가 내 마지막 길을 함께 해주느냐인 것 같아”


이제 강을 건널 때입니다

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맞아

세조가 무서워 다들 도망갈 때

시신을 거뒀던 엄흥도의 그 ‘옳은 일’

우리도 그런 용기 있는 사람 하나쯤 곁에 두면 좋겠네

아니,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면 더 좋고”

헬렌스빌 팜스프링 노천 온천의 하얀 김처럼

영화관의 열기가 오클랜드 가을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지금은 여전히 여기 있었고,

여기는 지금과 함께 있었다

오늘도 세로토닌 1 킬로그램,

단종의 눈물 한 사발,

엄흥도의 충절 한 지게 짐

이 정도면 그 나름 하루하루로

여유롭게 충분히 잘 보내는 건가

엔딩 자막 속 영월 장릉의 소나무 소리가

오클랜드와이라우의 바람결에 섞여 들려왔다.

“전하, 이제 강을 건널 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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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백동흠 

수필 등단: 2015년 에세이문학. 수필집: 아내의 뜰(2021년). Heavens 지금여기(2022년). 수상: 2017년 제 19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대상 (깬니프!). 2022년 제 40회 현대수필문학상 (Heavens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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