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8편]; BLACK BEER

손바닥소설

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8편]; BLACK BEER

일요시사 0 1533

“언젠가 이렇게 누워 자다가 영원히 눈감을 수도 있겠어.”  “그야 나쁠 건 없지.” “인생 뭐 별거 있나?” “가는 날까지 소일거리 일에 정 붙여 살다가 때 되면 놓고 가는 거지.” “나 죽으면 화장해서 이곳 레드우드 수목원에 뿌려주구려.”  “그건 내 생각인데.” “자식들, 멀리 사는데 언제든지 보고 싶다면 이곳 숲에 와 거닐라지.” “그도 좋겠네. 뭐 거추장스럽게 무덤 만들 일 있겠나.” 

 

 

로토루아의 레드우드 숲은 거기에 언제나처럼 그대로다. 오르막 두 갈래 길에서 Tonn이 Sunn 손을 잡고 부축한다. 삼림욕에 푹 빠지는 시간이 고향 뒷산 오르는 기분이다. 점심때를 넘긴 터라 꼬르륵 신호가 울린다. 지난달부터 연금수령자가 된 Sunn. 오늘 골드카드(노인 교통 우대카드)를 발급받았으니 축하받는 날이다.  3년전, 연금을 받으며 국가 준공무원(?)이 됐다고 자랑을 하던 Tonn이 골드카드에 관해서는 Sunn의 선배다. 경험 선배가 후배 데리고 바람 한번 쐬자고 나선 발걸음에 생기도 오르고. 이마에 땀이 약간 밸 무렵, 나무 벤치 쉼터가 반긴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나무 벤치 위에 내려놓자 자유롭다. Tonn이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내는데 아직도 따뜻한 열기가 살아있다. ‘Hot Cooked Pork Shoulder Roast’라는 라벨이 붙어있는 은박지 뭉치. 두툼하고 묵직하다. 잘 구워져서 돼지고기 수육으로는 먹음직스럽다. 오는 길에 로투루아에서 가장 큰 쇼핑점, 파킨세이브(PAK’nSAVE)에서 $10 주고 사 온 것이다. 가위로 고기를 먹기 좋게 자른다. 은박지 접시에 담으니 수북하다. 함께 사 온 김치와 흑맥주 두 병을 꺼내놓는다. 돼지고기 수육과 궁합은 한국 김치가 딱 좋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음료수, 흑맥주를 딴다. 쌉쌀하면서도 구수해서 한 병만 마셔도 든든해지는 원천 수. 수육, 김치, 흑맥주(몬티스 블랙비어)- 이 정도면 뉴질랜드에서 그런대로 3 합이다.

 

“몸보신에 이만한 게 있나? 자! 병째로 건배합시다!”

“그래요. 기분도 꿀꿀하던 차에 잘됐네!”

“Sunn! 생일 축하해. 이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고맙구려. 늦게라도 챙겨준 Tonn이 옆에 있으니 됐지. 뭘 더 바래”

 

둘이 병째로 입에 흑맥주를 털어 넣는다. 콸콸콸~ 짙은 검은 색 거품이 일품이다. 칼칼하고 쌉쌀하다. 입에 감기는 향기로운 맛! 5.2도의 가벼운 느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퍼져나간다.

 

신선한 김치 위에 얹은 돼지고기가 입안에서 술술 녹는다. 또 한입, 볼이 터질듯한 느낌이다. 입안 가득, 여물처럼 잘도 우적우적 씹는다. 레드우드 숲의 소나무 바람향이 간을 맞춘다. 고기, 김치, 맥주 다 합해도 비용이 부담 없는 가격 40불 이내다. 어쩌다 한 번씩 수목원에 나와 조촐하게 고기도 먹고 한 잔씩 하는 이 맛! 얼추 배가 부르자, 둘 다 나무 데크에 나란히 눕는다.

 

“언젠가 이렇게 누워 자다가 영원히 눈감을 수도 있겠어.”

“그야 나쁠 건 없지.”

“인생 뭐 별거 있나?”

“가는 날까지 소일거리 일에 정 붙여 살다가 때 되면 놓고 가는 거지.”

“어라, 신선 노인 같이 말도 잘하네.”

“나 죽으면 화장해서 이 곳 레드우드 수목원에 뿌려주구려.”

“그건 내 생각인데.”

“자식들, 멀리 사는데 언제든지 보고 싶다면 이 곳 숲에 와 거닐라지.”

“그도 좋겠네. 뭐 거추장스럽게 무덤 만들 일 있겠나.”

“그것도 외국인데, 다음 그다음 세대만 돼도 오기 힘들 텐데, 관리도 안 되고.”

“차라리 편안히 잠들면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이곳 산림에 있으면 좋겠구먼.”

둘이 중얼중얼대다 낮잠에 스르르 빠져든다.

 

***

 

Tonn이 Sunn 을 만난 것은 10년 전이다. Tonn이 58세, Sunn 이 55세 때다. Tonn이 상처 후, 혼자 살면서도 건축 일을 아름아름했다. 어느 날, 스캡홀딩(지지대)이 무너져 Tonn 등을 덮쳤다. 그 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고 물리치료를 받았으나, 통증이 여전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 허리가 시리고 쑤셨다. 교민지에 난 광고를 보고 마음이 동했다. ‘로토루아 온천수, 온돌방 물리치료’ B&B 광고를 보고 왔던 것이다. 모텔보다 싸고 백백커보다 약간 높은 가격이었지만, 무난한 가격이었다. 한 달간, 푹 온돌방에 지지고 올 요량이었다. 가마솥 아궁이에서 땐 열기가 방바닥을 푹푹 끓게 했던 옛 시절 추억이 그리웠다. 로토루아 온천 수를 방바닥 아래 파이프에 연결해 흐르게 한 터라 방이 지글지글 끓었다. 

 

첫날 와서 B&B 온천 샤워를 마치고 그 온돌방에 누웠다. 뉴질랜드 이민 와서 20여 년 만에 아주 달게 곯아떨어졌다. 알렉산더대왕이나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부럽지 않았다. 깊은 단잠에서 깨어나니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창문을 여니 로토루아 특유의 유황온천 냄새가 진동했다. 어슴푸레 피어오르는 이상한 나라 동화 속에 온듯했다. 점심을 간단히 마치고, 부근 레드우드 수목원을 거닐었다. 하늘높이 쭉쭉 뻗은 삼나무 고송들이 하늘을 찔렀다. 간간이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이 Tonn 눈을 부시게 했다. 맑은 햇살 샤워라도 하는 듯 개운하고 상쾌했다. 그 청량한 느낌에 양팔을 활짝 펴고 긴 호흡을 들이 내쉬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인가. Freedom! 외쳤다. 이 터전에서 머무르며 살고 싶어졌다. 이어지는 일상을 푹 쉬었다. 7시간 이상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 음식을 먹고 싶은 대로 조촐하게 해 먹었다. 다음은 천천히 레드우드 수목원을 거닐었다. 한 주일이 훌쩍 구름처럼 흘러갔다. 고목처럼 소진되었던 옛 몸이 새싹 돋듯 청정에너지로 충전되었다. 등허리 아픈 것도 차츰 차도가 보였다.

 

레드우드 삼림욕을 마치고 B&B에 들어서자 S가 분주히 움직였다. 물을 훔쳐냈다. 샤워장 파이프와 연결 조인트 부분이 터져 물이 샜다. 본능적인 수리 감각이 발동해 Tonn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B&B에 있는 공구로 풀어 뜯었다. 연결 부위에 응급 씰 대용으로 고무줄을 녹여 붙이고 조였다. 물 새는 것이 멈췄다. Sunn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에 10여 년간 노스코트 칼리지에서 시설관리 일을 했다는 Tonn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Sunn 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Tonn이 시설물이나 기계에 고장이 나면 Tonn이 맡아서 뚝딱거렸다. 한 달이 지나고도 눌러앉다 보니 B&B의 시설관리 담당 매니저가 되었다. 룸 청소 일도 거들었다. Tonn과 Sunn의 손발이 척척 맞았다. 세월은 그런 둘 사이를 광속도로 달렸다. 3년이 훌쩍 지나며 둘은 파트너사이로 깊어갔다.

어느 날, Tonn이 조촐한 상을 마련하고 S를 불렀다. 수육(Roast Fork), 김치, 흑맥주(Black Beer) 두 병, 축하 케이크가 전부였다. 흑맥주 병끼리 짠하고 부딪치며 건배를 했다. 생일 선물이라며 Tonn이 통장을 Sunn 에게 내밀었다. Sunn 이 물었다. 

 

“뭔데 이런 걸 주는 거요?”

“고마워서 하는 선물이오. 늙은 홀아비, 누구 하나 받아주지 않았는데… . 내 허리 병도 낫고, 잠자리 숙소도 해결됐고, 급여까지 주니 고마울 수밖에. 그동안 받은 급여, 알뜰히 쓰고 모았더니 만 불이 됐소. 돌려 드리니 건강에 좋은 것 사 드시오. 여행도 다녀오시고.”

“???”

Sunn 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 남편과 이혼 한지 10 여년, 그때 악몽이 되살아났다. 

‘내게도 이런 사람이 옆에 있다니… .’

“그 돈, 호주에 산다는 손녀 용돈 주세요. 급히 쓸데도 있을 테니 다시 넣어둬요.”

“내, Sunn 의 머슴이 되겠소. 요즘 생활이 고마워서 그래요. 육십 평생, 볼꼴 못 볼꼴 너무 많이 봤소. 이제, 딴 사람 만나 그런저런 일은 안 겪고 싶소.”

그 날 밤, 둘은 남은 세상 함께 살기로 다짐했다. 온 세상이 비로소 환하게 보였다.

 

 

***

 

Tonn이 가만히 눈을 뜨니 레드우드 나뭇잎들이 바람에 물결 춤을 추었다. 햇살도 그 사이사이로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 불현듯 떠올랐다. 골목 한쪽에서 딱지치기를 실컷 한 뒤, 나중에는 땅따먹기 놀이를 했다. 땅거미 지고 해거름이 가까워지는 줄도 몰랐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나올 때까지 놀이에 푹 빠졌다. 그랬다. 지금도 딱 그런 느낌이다. 

 

이제는 누가 부르러 오시나? 어머니야 돌아가셨고, 가족들도 다 흩어져 곁에 없다. 분명 저녁이 올 테고, 언젠가는 부르러 올 텐데. 탈래탈래 따라가야 할 게 아닌가? 이민 살이, 이렇게 저물어 가는 가 싶다. 한 솔기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옆에 누워있던 Sunn 도 눈을 뜬 채로 생각에 젖어있다. 레드우드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본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가 일대에 걸쳐 있는 레드우드는 땅속 깊숙이 내린 뿌리들끼리 얽히고 섥켜있다. 어떤 강풍이 몰아쳐도 탄탄한 기반 때문에 흔들릴 수가 넘쳐있다.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특히나 이민 사회에서는 더욱. 혼자 외롭게 서 있다가는 외부의 강풍에 쉽사리 쓰러지기 마련이다. 끈끈한 관계, 단 둘만이라도 서로 믿고 기댈 수 있다면 그게, 노년의 작은 행복이 아닐까. Tonn이 옆에 누워있는 Sonne을 곁눈질해 본다. S도 반쯤 눈을 뜨고 나무 끝,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나무 사이로 가녀린 햇살 줄기가 흘러내려 온다. *

 

 

 

LYNN : 소설가. 오클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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