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
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잘 하지 않는다. 큰소리를 질러 본 적도 별로 없다. 아주 안 한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내 기억에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말로 고치려거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두세 살 터울의 고만고만한 사내아이 셋을 키우면서 그 악역을 아내에게만 맡긴다는 뜻은 아니다. 아들과 아빠 사이에는, 아니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을 치유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내 나름대로 믿고 있어서 그렇다. 악수이다. 시험을 잘 못 봐 낙심하고 있을 때도, 운동 경기에 져서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와 미안해할 때도 나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아들, 악수하자. 악수하면 되는 거야.” 손과 손이 서로 껴안을 때, 실망과 침울과 불안이 사라진다. 열 마디 백 마디 말보다 때로는 무언의 악수 한 동작이 모든 것을 풀어준다. 그 짧은 순간, 마음이 열리고 새 세상이 느껴진다. 악수는 사람이 만들어낸 최고의 몸짓이다. 악수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다. 악수하지 않는 다른 한 손은 어깨를 두드려야 한다. ‘그 정도면 충분해’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옅은 웃음이 흐른다. 그걸로 끝이다. 세상사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뜻밖에 단순하다. 악수 하나로 모든 게 이해되는 사이, 그게 바로 부자 관계 그리고 사람 관계여야 한다고 믿는다. 스물두 살 가을 끝자락, 나는 머리를 빡빡 깎고 논산행 기차를 탔다. 그날 새벽,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고 해도,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난생처음 해본 큰절이었다. 아버지는 유독 격식을 싫어했다. 설날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에도 마다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석에 앉아 절을 받았다. “잘 갔다 와라.” 아버지는 악수를 건넸다. 먼 길 떠나는 아들을 향해 아무 표정이 없으셨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가 집 밖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 배웅했다. 몇만 원의 비상금을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힘들어도 참아라. 밥 잘 먹고……. 기도할께.” 어머니는 하염없이 우셨다. 마치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눈물로 아들을 보냈다. 이년 반 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예비군 옷을 입고 부모님께 큰절을 드렸다. 아버지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고생했다.” 한 마디뿐이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보였다. 안도의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꽃게를 삶아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잘 참아줘서 고맙다.” 환하게 웃으셨다. 첫 직장을 잡았을 때도, 일 년 계획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도, 큰아들을 품에 안겨줬을 때도, 뉴질랜드 이민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도, 몇 년 뒤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아버지는 늘 손을 내밀었다. ‘남자끼리는 악수하면 되는 거야’하는 무언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마지막 악수를 건넨 것은 언제쯤일까? 생각해보니 여섯 해 전 이월 초로 기억된다. 간암 말기, 모르핀으로 겨우 목숨을 유지하던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OO야~ 꼭 부자로 사는 게 복은 아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그러며 내 손을 잡았다. 핏기 하나 없는 손, 악수라고 할 수도 없는 힘에 부친 부자간 마지막 접촉이었다. 아버지는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손을 기억한다. 길고 하얀 손, 그리고 온기. 늦가을 어느 날 밤, 동네 공원을 뒤돌아서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첫 데이트가 끝나고 막 헤어지려고 할 때였다. 나는 갑자기 악수가 하고 싶어졌다. 신체 중 한 부분을 만지고 싶은, 스킨십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 사랑스러워 손이라도 만졌으면 했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천생 여자의 손이었다. 여자의 손은 때로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다섯 손가락 사이에 여자 특유의 한이 묻어 있다. 그 생이 스무 살이든 마흔 살 또는 쉰 살이든, 아니 여든 살 할머니든 같은 질감으로 와 닿는다. 그것은 쉽사리 잡을 수 없는 손, 너무 여려 바스러질 것 같은 슬픈 손이다. 그 손으로 연인을, 가족을, 세상을 껴안지만 정작 그 손을 인간적으로 대하며 애정 있게 잡아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명 인사의 손을 잡아본 경험이 몇 번 있다. 대통령 후보, 서울 올림픽조직위원장, 재야운동가가 기억에 남는다. 그들의 손은, 악수는 무엇보다 힘이 세다. 그 힘은 어쩌면 그들이 가진 위치 또는 자신감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남자다움은 있었지만 인간다움은 없었다. 손과 손 사이, 마치 쇠뭉치를 대하듯 사람의 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면 여자의 손, 악수는 달랐다.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봉사하는 수녀, 동화를 쓰는 사십 대 작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간호 선교사, 그들의 손은 한결같이 작고 가늘었지만, 세상 온도를 일 도쯤은 높일 수 있을 것처럼 따듯했다. 손과 손 사이, 마치 솜사탕을 대하듯 부드러웠다. 한때 내 사랑이었던 그녀는 유독 손 잡는 것을 좋아했다. 남자다운 억센 악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공자다운 섬세한 손 마디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손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며 내 손을 사랑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사랑도 사위어갔다. 몇 년 뒤 초가을 늦저녁, 그녀가 내게 악수를 요구했다. “잘 가.” 안녕을 고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마지막 말. “이 손을 언제 또 잡아보지? 참 좋았었는데…….” 여전히 길고 하얀 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가을바람을 따라 내 곁을 떠났다. 지금도 나는 그녀의 길고 하얀 손이 기억난다. 얼굴을 생각하면 그저 그리울 뿐인데, 손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손과 손 사이, 우리의 모든 것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녀가 한 발짝 두 발짝 멀어져갔다. 둘 곳 없는 내 손, 가로등 불빛에 더 서글퍼 보였다. 내 손을 유심히 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투박하지도 수려하지도 않은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손.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과 악수를 했던가.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간 옷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과 인사를 했던가. 때로는 격려의 손, 때로는 믿음의 손 그리고 또 때로는 사랑의 손 역할을 다해 왔다. 불현듯 악수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남자든 여자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 어느 순간 내 손을 펼쳐 상대방 손을 꼭 잡고 싶다. 사람 온기에 허기가 진 것일까? 아니면, 사랑의 손이 그리운 걸까? 내일은 그 누가 되든 무조건 악수를 건네야겠다. 시인과나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