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록

손바닥소설

추억록

오문회 0 2008


오랜 친구 같은 시집을 발견했다. 

시집을 발견한 곳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실로암도서관이다. 기부로 세워졌고 기부로 소장 장서가 결정된다. 그러다 보니 철이 한참 지난 책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공공도서관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고서적들이 박물관의 쇼윈도에 숨어 있지 않고 오래된 친구에게서나 맡을 수 있는 구수한 향기를 내뿜으며 내 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윤시집 [홀로 서기] 

1987년, 내가 상병 계급장을 달았던 해이다. 상병이 되고부터 일과를 마친 후에 내가 하는 일은 추억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군 생활의 추억을 엮어서 전역하는 선임병들에게 전해주는 소대원의 선물이 추억록이다. 전역명령을 받은 병장으로부터 받은 사진들, 소대원들의 격려 글들, 그리고 소속 부대를 잊지 않도록 부대 깃발, 부대가(歌) 등으로 꾸며져 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일과 후에 하는 일이다 보니 여유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전방 작전 일정이 있을 때에는 준비물을 민간에서 구할 수 없으니 투입 전에 필요한 것을 다 마련해야 한다. 당연히 마음이 바쁘다. 그리고 어쩌다 전역하는 사람이 하나 이상일 경우에는 그야말로 말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된다. 다행하게도 우리 소대는 신입과 전역병의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전투력이 잘 유지되는 부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대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내가 만들어준 추억록에는 어김없이 “홀로 서기”가 들어 있다. 제목의 부연 설명으로 이런 글이 함께 적혀있다.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같은 부대원이지만 작전에 들어가면 홀로 설 수밖에 없다. 피아의 총구와 포구는 모두 우리를 종착역으로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총구와 포구는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옆의 전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탄을 장전하고 수류탄, 크레이모아를 들고 다니는 내가 실수하지 않고 바로 서야 옆의 전우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곳이 작전지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홀로 서기”만큼은 꼭 추억록에 실었었다. 시가 주는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감상하는 자세는 군인정신에 부합하다고 단정한 듯 나는 언제나 그 긴 시에서 내가 필요한 첫 부분만을 발췌하여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홀로 서기는 군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긴 밤을 들짐승과 풀벌레들이 부시럭대는 소리와 싸워야 하는 잠든 영혼에 살짝 붙어 쫑긋이 귀를 세운 나의 청각마저도 홀로 서는 밤. 그런 밤이 작전 중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전역 후 사람으로 돌아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밤새워 걷고 또 걸으면 입 안의 군가도 사라지고 가요는 물론 동요마저 바닥을 보이고 머리에 담아 놓은 추억마저도 다 흩어져 버리면 남아 있는 것은 희미하게 들리는 앞 전우의 군화 소리만을 뒤쫓는 내 귀 그리고 자동으로 움직여주는 내 발만 남아 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홀로 서시라. 거긴 당신의 귀에 들려줄 전우의 군화소리도 없으며 군화 소리 놓쳐 식은 땀에 영혼이 깨어날 때 들려줄 작은 호각 소리도 존재하지 않으니 홀로 서시라.

내가 1년이 넘게 만든 추억록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또 있었다. 나는 소대원 한 명 한 명에게 전역예정자에게 전하는 글을 담은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는 반드시 16절지 한 장으로 쓰여 있고 또 다른 16절지 한 장이 겹으로 글을 덮고 있으며 내용을 열어 볼 수 없도록 4면의 끝자락을 둘러서 풀칠을 한다. 물론 그렇게 작성된 편지들은 추억록에 함께 묶인다. 

전역을 명 받은 병장들은 소대와 중대를 거쳐 대대장보고를 마친 후에 사단으로 가는 트럭에 올라탄다. 우리 소대의 전역병들은 트럭에 올라타야 추억록을 받아 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떤 내용을 편지에 담았는지 알 수 없으나 나의 경우는 대체로 수고하셨다는 말과 함께 민간에서 만나면 존대를 할 수 없으니 그리 아시라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선임병들이 나이로는 나보다 어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나도 전역 특명을 기다리는 순서가 되었다. 국방부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후임병들이 추억록을 만든다고 했지만 나는 만들지 못하게 했다. 나의 선임병들은 고등학교가 최종 학년이고 나는 대학 2년을 마치고 입대했기에 그들보다 3개월 빨리 전역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군 생활이 무슨 대단한 추억이라고 기억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몇 권의 추억록을 만들면서 정리했기 때문이다. 함께 전역하는 우리 소대 선임병들도 중대의 선임병들도 모두 나보다 3개월 가량 먼저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소대에 삼 개월 혜택을 받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나 외에 한 명이 더 혜택을 받는데 그는 한 달 반을 받는 경우였다. 내가 군 생활을 한 86년부터 88년 사이의 동부전선 최전방부대의 현실은 이런 것이었다.

“병장 OOO외 O명은 1988년 O월 O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대대장에게 전역보고를 마친 후 소대에 내려왔을 때 소대원들은 추억록 대신 부대 마크와 소대원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진 기념패를 전해주었다. 가까운 읍내에서 맞춘 모양이다. 그 기념패는 몇 번의 이사로 인해 어디로 쓸려나갔는지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 추억록이 없고 기념패가 없어졌다고 해서 나의 군 생활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 군 생활의 기억은 추억록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 한 권의 묵은 시집과 함께 내 추억의 한 자리에 이미 똬리를 틀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역 후 오래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길거리에서 함께 근무했던 소대 선임병을 만났다. 

“김 병장님 아니십니까? 저 추억록 만들던 박 상병입니다.”

“아! 박 상병! 그래, 이 ㅅㄲ, 밖에서 보니 좋네, 근데 너 서울 사냐?”

“예, 그런데 김 병장님도 서울에 사십니까?” <끝>

평상심 오클랜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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