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1-1) -대한국제물류 홍승필 대표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이민 열전(1-1) -대한국제물류 홍승필 대표

일요시사 0 2544
일요시사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1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어릴 적 내 꿈은 군인, 세상을 마음껏 호령하고 싶었다.

20대 말에 아버지 돌아가셔 사장 자리 물려받아…경영 미숙으로 5년 만에 완전히 빈털터리 돼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 위로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올라갔다. 주연 배우에 이어 조연들 그리고 수많은 스태프. 몇십초 아니 몇 분간 이름 행진이 이어졌다. 그 누구 하나 자기에게 맡겨진 제 몫을 다 못했다면 ‘단군 이래 최대 관람객을 모은 영화’라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관람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도 자석에 붙은 쇠붙이처럼 한동안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얼마 만에 보는 영화인가? 지인이 선물로 영화표 두 장을 보내줬다. 오클랜드에서 내가 한국영화를 볼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가 이곳에서 종종 상영되곤 했다. 또 해마다 열리는 한국영화제에 몇몇 관심작이 현지 극장을 통해 상영되고 있는 만큼 조금만 유심히 봤다면 한국 영화 한두 편쯤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민 생활 열다섯 해가 다 되도록 한국 영화 아니 영화라는 세상은 내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이민살이가 심적으로 힘들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영화 ‘명량’ 보며 내 어릴 적 꿈 떠올려

 ‘명량’.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전쟁 얘기를 담은 영화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 내내 나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너무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어릴 적 내 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400여 년 전, 이순신 장군은 열두 척의 배로 수백 척의 배를 물리쳤다. 꺼져가던 촛불 같은 나라의 운명을 되살린 것이다. 성웅 이순신. ‘거룩한 영웅’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코흘리개 초등학생 때부터 내게 인식되어온,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정의였다.

내 꿈은 군인이었다. 멋진 갑옷을 입고 허리에 긴 칼을 찬 이순신처럼, 나도 반짝반짝 윤이 나는 금빛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허리에는 권총을 꿰찬 장군이 되고 싶었다. 비 오듯 퍼붓는 총알 속에서도 멋지게 살아남아 적지를 점령, 내 손으로 태극기를 꽂고 싶었다. 동네 아이들과도 전쟁놀이를 즐겼다. 정황상 늘 져야만 하는 적군(북한군)이 되기 싫어 국군, 그중에서도 무궁화가 몇 개쯤은 되는 고급 장교여야만 했다. 까까머리에 바가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목에 힘을 주어 “자, 이제 나를 따르라”고 소리쳐 외치면 수많은 부하가 줄줄 따라오곤 했다. 별 놀거리가 없던 그 시절, 전쟁놀이는 내 나이 또래가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내 고향은 충청남도 청양이다. ‘청양고추’로 유명한 그 청양이 내 어릴 적에 뛰놀던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청양고추처럼 아삭하고 톡 쏘는 삶이 좋다. 이제 반백 년을 갓 넘어 산 내가 지금 돌아봐도 내 인생은, 이민 생활은 그 누구보다 아삭하고 톡톡 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짜릿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청양 산 고추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별로 튀지 않는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시절을 큰 의미 없이 지냈다. 그 사이 남들 다 갔다 오는 군대를 갔다 오기도 했다. 대학을 마치고 아버지 사업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업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아버지가 무서워 어쩔 수 없이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20대 후반,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잘 나가는 친구로 알려졌다. 짐작하다시피 바로 돈 때문이었다. 좋은 차를 타고, 비싼 술을 마셨다. 원래 보스 기질이 있었던 내게는 돈이 어깨를 쫙 펴게 해주었던 무기이기도 했다. 돈의 위력을 너무 어린 나이에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돈 있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때 분명히 알았다. 서른도 되기 전, 너무 일찌감치 알게 된 진리(?) 때문에 내 인생은 행복하기도 했지만, 훗날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별명은 ‘역곡 망치’, 불의 보면 못 참아

 그 당시 내 별명은 불도저였다. 앞만 보고 밀고 나간다는 뜻이었다. 또 하나는, 이 지면에서 말하기가 조금 그렇지만 ‘역곡 망치’였다. 경찰서와 파출소 순경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눈치를 이미 챘겠지만 하도 자주 무엇을 부숴대서 얻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조폭이나 동네 깡패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내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싫어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세상을 더 멋있게 만들 수 있다는 ‘정의봉’이라고 생각해 필요할 때마다 ‘망치’를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길거리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 ‘동네 어깨’가 이유 없이 내 어깨를 툭 친 것이다. 나는 아무 잘못 한 것이 없기에 선방으로 주먹을 한 대 날렸다. 상대방도 어깨 체면에 그냥 맞을 수만은 없어 ‘한 방’. 그렇게 주먹이 오가다가 상대방이 역부족이라고 느낄 때쯤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모르는 그쪽 어깨들이 사방에서 몰려든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면 사내대장부 체면이 아니다. 이때 나는 ‘망치’를 들었다. 망치는 내게 있어 전쟁터에 나간 군인의 총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나는 그 누구에게든 지고는 못 살았다. 특히 내 생각에 부당하다고 느낀 경우에는 더욱더 그랬다. 내가 질 게 뻔한 싸움에도 절대 피하지 않았다. 열 대 맞고 한 대를 때리더라도 그 한 대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 주먹을 내둘렀다. 때로는 그게 3대 1일 수도 있었고, 또 때로는 그게 전설 같은 18대 1은 아니더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9 대 1쯤은 되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느끼면 대항하지 않았지만, 내 잘못이 없는데도 상대방이 시비를 걸어오거나 주먹을 휘두르면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것이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스며 있던 참 군인 정신이었는지도 모른다.

 20대 말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 또래 젊은이의 철없는 객기 또는 알량한 치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일이 벌어졌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피할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고 또 그 결과, 돌아보면 뉴질랜드 이민 짐을 쌀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해서 여기에 옮긴다.

갑자기 저 멀리서 ‘펑’…내 인생 바꿔


 스물여덟 살의 봄 1990년 어느 날,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아버지 공장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었다. 아마 오후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직원들과 함께 프레스 기계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그 기계 부품 가운데 하나가 고장 나 수리점에 맡긴 후 다시 찾아와 시험 가동을 하던 중이었다. 제대로 작동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작동하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프레스 기계는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몇십 분을 그렇게 보냈다. 아버지가 내게 갑자기 떡을 사 오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배가 출출하셨는지, 아니면 나를 생각해 내가 좋아하던 떡을 먹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마침 공장 안으로 떡 장수 아주머니가 들어섰다. 종종 우리 공장에 들러 인절미나 찹쌀떡을 팔던 분이셨다. 공장 사무실에서 한참 떡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들고 있었던 떡을 내 던지고 밖에 나가보니 아버지가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프레스 기계 압력이 더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리면서 아버지를 내동댕이 친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는 곧바로 봉고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는 아버지 부상이 너무 심해 가망이 없다고 했다.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더 사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곱 시간 뒤,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 칠순 잔치를 한 해 앞둔 나이셨다.

 지금 돌아와 생각해보면 어쩌면 아버지는 나 대신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떡을 드시고 싶지 않으셨다면, 아니 그 이유로 나를 잠깐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그 파편은 내가 맞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사고가 난 지도 벌써 스물다섯 해나 됐지만, 오늘도 그때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비극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슴 아픈 과거를 돌이켜 볼 때마다 ‘그 어떤 절대자의 신비한 힘’이 때마침 역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는 살아남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밖에 공부하지 못했다. 경기도 파주 미군 부대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작은아버지가 하시던 부천의 한 신발 공장을 인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주로 패션용 신발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자무식까지는 아니었지만,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아버지는 그 누구에 못지않은 경영 수완을 발휘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에게는 밤늦게까지 술 마시기 좋아하고 친구랑 어울려 놀기에만 바쁜 외동아들 놈이 못 미더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 사업을 물려받게 하려고 틈틈이 시간을 내 경영 수업을 시켰다. 나는 그게 싫었고 그래서 이유 없이 반항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의 깊은 뜻을 몰랐던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절대 봉급쟁이는 하지 마라” 아버지 당부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승필아. 봉급쟁이는 절대로 하지 마라. 힘들어도 네 사업을 해라. 그래야 돈을 벌 수 있다. 많이 벌어 좋은 데도 힘 보태고 그렇게 살아라.”

 어쩔 수 없어 한 일이었지만 일 하는 동안에는 아버지 맘에 들고 싶었다. 무척 바쁜 어느 날이었다. 상품이 하나 히트하면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나도 생산 설비에 앉아 있었다. 내 딴에는 작은 힘이라도 더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거래처에 일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승필아. 너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놈이다. 그런 놈이 직원들 사이에 끼여 신발 하나 더 만든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 너는 선장이니까 키를 쥐고 멀리 바라봐야 한다. 선장이 갈 길을 잃으면 널 믿고 탄 선원들이 헤매게 된다. 훗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거다.”

 그랬다. 내가 뉴질랜드에 와서 비록 자그마한 규모였지만 그래도 내 사업을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을 잡았다. 아버지는 오래전, 선견지명을 갖고 내게 조언을 해 주신 셈이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지만, 사업에서만큼은 대학물 먹은 나보다 훨씬 위에 계셨다. 사업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그때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넓은 공장, 수많은 기계들 그리고 50명에 가까운 직원들……. 그 모든 게 내 책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에 서툴렀다. 자연스럽게 사업도, 인간관계도 하나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빈자리가 너무 컸다. 20대 후반의 젊은 사장은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5년 뒤, 공장 문은 닫혔다. 내 화려했던 시절은 피다만 장미꽃처럼 허무하게 저물었다.

 그 뒤, 나는 학습지 교사 등 이런저런 일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일찍 세상의 단맛을 본 내가 그 맛에 취해 세상을 만만하게 봐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새 천 년이 한 해 지난 2001년 5월 14일, 나는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내가, 아니 내 아내가 받은 영주권 덕분이었다. 한국에서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지만 내 마음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리 부부 옆에는 그 누구보다 귀한 우리들의 분신인 아들, 정윤이가 있었다. 그리고 뉴질랜드 돈 5만 달러, 그게 전부였다. < 계속>

구술: 홍승필 / 정리: 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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