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3편] 조르바와 춤을
강아지 해피가 지루해하며 눈을 감았다. 해처럼 피어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 해피. 언제 피어나려나? 아내가 일 나간 뒤 큰 집안은 괴괴했다. 오전에 집안 허드렛일을 마치고 나서 쉬다 보니 Peter도 나른했다. Peter가 데크 햇살에 웅크리고 있는 해피를 쓰다듬어줬다. 비숑 강아지 특유의 털이 어린 양털처럼 부풀어 올라 뭉게구름 같다. 해피가 살며시 실눈을 뜨며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다시 초승달 눈을 감았다.
‘마냥 쉬고 싶어요, 주인님. 햇볕 좀 쬐게 그냥 있게 해줘요.’
디오게네스를 닮고 싶은 해피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Peter가 손을 슬그머니 치웠다. 말 못 하는 강아지도 자기 시간이 필요하겠지. 지난달, Peter가 집 외벽 페인트칠하는데, 해피가 사고를 쳤다. 그 사고로 거의 죽을뻔 했던 해피가 뭘 원하겠나. 그저 쉬는 거지.
***
그날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페인트 묻을까 봐 담장 옆 나무에 묶어두었던 해피 녀석. Peter는 집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잘 못 칠한 부위를 지우려고 씬나를 찾으러 개라지에 간 사이였다. 우당탕 쿵! 하는 소리와 동시에 깨갱! 소리가 자지러졌다. 부리나케 밖에 나와보니 해피가 쓰러진 알루미늄 사다리에 깔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해피가 사다리 옆을 지나다 줄이 걸려 끄는 바람에 그만 사다리가 쓰러졌다. 불행히도 해피의 머리를 덮쳐 뇌진탕 직전이었다. Peter는 해피를 끌어안고 부랴부랴 인근 애완견 클리닉 센터로 달려갔다. 수의사의 응급 대응으로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검사결과 그나마 두개골에 이상은 없었다. 진정 주사를 맞고 나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뒤로 해피는 소파 구석에 누워만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밥때만 되면 보채던 습관이 사라졌다. 사다리가 덮친 충격에 식욕도 달아난 모양이었다. 그러길 여러 날, 한 달이 지나자 겨우 산책길에 따라나섰다. 예전처럼 다른 강아지를 보면 짓거나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개구쟁이 어린아이가 얄궂을 땐 성가시지만, 아픈 치레라도 하고 나서 웃음기가 가시면 안타깝듯이 짠했다. Peter의 아픈 과거가 비 오면 도지는 신경통처럼 찌르르하게 왼 필 어깨에 몰려왔다. 베트남 공장, 생산 라인 증축 공사현장에서 당한 사고가 악몽처럼 떠올랐다.
Peter는 15년 이상 한국 전자제품 회사, 생산기술 부문에서 일해왔다. 두 딸이 중학교 때 뉴질랜드에 유학 가서 적응을 잘하던 중이었다. 내친김에 대학 졸업까지 학업을 이어가기로 하고 아내가 옆에서 잘 돌봐왔다. Peter는 매년 보름간 휴가를 내서 뉴질랜드 가족을 찾아 함께 지내곤 했다. 그렇게 기러기 아빠로 살다가 베트남 현지 공장 생산라인 설비기술 책임자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고생해도 보장된 미래가 눈에 보였다. 1년만 잘 지나면 Peter도 중역으로 승진할 위치였다. 중역이 되고 2~3년 후 은퇴하면 노후 경제여건도 좋을 듯싶었다. 그때 가족과 만나 뉴질랜드 생활을 하리라 다짐했다. 다른 생각 없이 일에만 매진했다.
베트남 공장 제품 판매가 동남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크게 호조를 보였다. 당연히 생산라인을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그룹 회장도 참석하는 완공식을 1주일 남긴 상태였다. 밤을 새워가며 생산 라인 설비 공사를 관리 감독하던 중, 지지대 구조물이 무너지며 그 밑에서 일하던 베트남 공사 인부 한 명이 깔려 즉사했다. Peter도 작업 도면을 든 왼팔에 직격탄을 맞아 쓰러졌다. 왼팔이 너덜너덜해졌다. 날벼락이었다.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깨어나지 못했다. 며칠 후, 아내가 소식을 듣고 호찌민 국립 병원으로 달려왔다. 수술 후 신경 치료 중이던 Peter의 왼팔을 붙들고 통곡했다.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 조직이 망가져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남의 팔이었다. 멀뚱히 아내를 바라보던 Peter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괴였다. 두 달간 병원 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퇴원했다. 군대에서 큰 사고로 근무가 힘들면 만기 전역을 못 하고 의가사 제대하듯 회사에서도 명예퇴직을 했다. 중역은 한낱 지나간 꿈이었다. 상해 보상금을 대신 받았다. 뉴질랜드로 오는 비행기에서 혼자 많이 흐느꼈다.
Peter가 뉴질랜드 도착한 날. 아내가 푸짐하고 정성 담긴 저녁상을 차렸다. 딸아이 둘과 남편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아내가 단호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아빠가 우리 가족을 위해 큰 수고를 하셨어. 이제부턴 아빠는 집에서 쉬시고 엄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 거야. 너희 둘도 남은 학업 잘 마치고 뉴질랜드 젊은이처럼 독립하렴. 당신은 지금부턴 하고 싶은 취미 일을 하며 지내시구려!”
딸 아이 둘의 눈엔 눈물이 반짝였다. Peter도 가슴이 뜨거워지며 방망이질을 했다.
‘어떻게 아내가 저렇게 바뀌었나. 뉴질랜드는 여성들이 기가 세다는데, 정말~’
아내는 3년간 일해오던 키위 꽃집을 과감히 인수했다. 아내의 간곡한 얘기를 듣고 마음씨 좋은 키위 할머니가 선뜻 가계를 넘겨주었다. 남편이 사고로 일하기 힘들어서 이 가계를 운영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동안 성심성의껏 일해온 인간성에 자비를 베푼 것. 이 두 가지가 키위 할머니 마음을 움직였다.
Peter는 왼팔을 다친 뒤로 힘쓰는 일을 잘 못 하게 됐다. 천천히 꾸준히 하는 일에 취미를 붙여가기로 했다. 퇴직금과 보상금으로 비치헤븐에 낡고 허름하지만 터가 넓은 집을 한 채 샀다. 아침이면 딸애들은 대학으로 아내는 직장으로 떠났다. 남은 건 Peter와 해피였다. Peter는 시간 나는 대로 비치헤븐 동네 일대를 해피와 산책 삼아 걸었다. 걷다가 눈에 띄는 특이한 것을 만나면 스마트 폰으로 찍었다. 좋은 집이나 아름다운 정원, 튼튼한 담장, 이색적인 우편함, 실용적인 데크, 앞마당에 잘 깔린 돌이나 타일, 과일이 탐스러운 나무들, 공사하는 모습, 집 단장하는 현장… . 집에 와서는 스케치북에 그렸다. 보금자리, 허술한 집에 어떻게 적용할까를 궁리했다. 조금씩 낡은 부위에 손을 대 집을 고쳐갔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Open Home 하는 집에 찾아가서 실내를 구경하고 왔다. 마찬가지로 집에 와서 스케치북에 옮겼다. 건축자재 파는 Mitere 10이나 Burning House 또 Warehouse 그리고 Placemakers 등지에 들러서도 유심히 살폈다.
집 외벽, 외더보드가 색이 바래고 곳곳에 이끼가 끼어서 페인트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필요한 페인트와 이끼 제거 제, 그리고 페인트 붓과 페인트 롤러 자재 들을 사 왔다. 접이식 사다리도 구했다. 첫날은 집 외벽에 이끼 제거제를 뿌렸다. 이어 물청소, 워터 블러스트팅 작업으로 깨끗하게 겉을 바꿔 놓았다. 이틀을 햇볕에 말린 후 본격적인 페인트 작업에 들어갔다. 아내와 딸아이가 아침에 출근하자 Peter 혼자 페인트칠을 했다.
심심한 맛도 있어 옆에 스마트폰을 켜 놓고 페인트 칠을 했다. 라디오 소설 ‘고전을 읽다’에서 ‘그리스인 조르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회당 25분으로 총 20편. 성우들 목소리와 음향효과가 옛날 중학교 때 듣던 옛날 라디오 연속 방송처럼 흥미로웠다. 몸은 비록 한 곳에서 페인트칠은 하지만 마음은 조르바와 춤을 추고 있었다. 한 주일이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작품 말미, 작가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쓴 묘비명 낭독에 가슴이 뭉근해졌다.
‘나는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 나는 아무도 부담스럽지 않다 / 나는 자유다’
자유인 조르바를 제대로 만났다. Peter도 인생 노후를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사는 대열에 발을 들여놓은 듯 느껴졌다. 마음만 먹으면 동양과 서양 그리고 현대와 고전을 섭렵할 수 있다는 생각.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 다음 날, 마무리 수정 작업 중, 사다리가 넘어지며 날 벼락이 애민 해피를 덮친 것이다.
***
해피가 실컷 잠을 잤는지 기지개를 켰다. Peter는 이때다 싶어 해피를 데리고 비치헤븐 쪽 와프로 산책을 떠났다. Peter가 해피 목줄을 가볍게 잡고서 뒤따랐다. 지난달 태풍으로 바닷가 포후투카와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모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상처받지 않은 것은 없구먼’
해피가 깡충거리며 그 나뭇가지를 뛰어넘었다. Peter가 나뭇가지를 들어 한쪽으로 치웠다. 헤럴드 아일랜드 쪽 노쓰 하버브리지 위에 석양 노을이 붉게 물들어갔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순간순간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묵직한 조르바의 음성이 잔잔한 파도를 타고 Peter의 귓전에 밀려왔다. *
# Lynn : 소설가. 오클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