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나이든 사람들이 쉽게 빠져드는 버릇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는 또한 나이든 사람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돌아볼 만한 과거가 있다는 것은 그리고 그 돌아보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무언가 다시 건져보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때때로 그런 시간을 갖는 것도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 오후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구석에 있는 장을 정리하다 서랍 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하고 꺼내는 도중 나는 희미한 기억의 뒤안길에 반짝하고 작은 불이 켜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걸 거야 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열어본 상자 속에는 거의 10년 전에 이사올 때 따로 보관해 놓았던 학창시절 친구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 대학 노트에 써놓은 일기와 잡다한 습작 글들, 심지어는 고등학교 때 문학의 밤(1965년) 프로그램도 발견했는데 그 프로그램에는 수필 ‘나와의 대화’를 낭독했던 내 이름도 있었다.
두 권의 대학 노트에는 주로 대학 시절의 일기와 단편소설 초고, 시, 수필 등 많은 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내 정신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 같아 혼자 얼굴도 붉히고 때로는 그 때 어떻게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둥 하기도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왜 그 때 계속 글을 쓰지 않고 사회로 뛰쳐나왔을까 하는 아쉬움과 회한도 다시 예전처럼 가슴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스크랩 해놓은 신문에 눈이 갔다. 무언가 하고 보았더니 공군사관학교 학교신문에 실렸던 내 글이었다. 1975년 1월23일 신문이니 꼭 40년전 글이었다. 그때 나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에 공군장교로 근무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마도 생도들의 부탁을 받고 신문에 글을 실었던 것 같다. 누렇게 퇴색한 신문지 위에 인쇄되어있는 작은 글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40년 전 26살의 나이에 무엇을 안다고 이런 글을 썼을까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치기만한 이런 글이 오히려 지금 나이 들어서 쓰는 글보다 진솔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저를 아는 여러분들과 같이 보기로 하고 있는 그대로 베껴보았습니다.(에즈라 파운드의 시와 보들레르의 시는 영어와 불어의 원문도 같이 있었는데 그건 지면을 아끼기 위해 뺐습니다)
이 글은 지금의 석운이 쓴 글이 아니라 40년전의 김모 공군 중위가 쓴 글이니 그렇게 양해하시고 읽어주시고 마음껏 평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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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妖精들에 찢겨진 四肢
세 명의 妖精이 내게 오더니
나를 갈기갈기 찢었다
올리브 나뭇가지가 껍질이 벗겨져
땅 위에 흩어진 곳에,
밝은 안개 아래에서의 창백한 학살. (에즈라 파운드의 詩 ‘4월’ 전문)
이 詩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경멸할 것이다. 이 詩는 우리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우리들 각 個人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우리의 즐거움은 그 느낌에서 시작되어 想像의 날개를 타고 美의 세계를 나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사람에게만 허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만이 想像의 能力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구태여 ‘想像의 세계는 永遠의 세계이다. 그것은 植物같이 成長한 육체가 죽은 뒤 우리가 뛰어들 神의 품이다 라는 윌리암 블레이크(W. Blake)의 말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보이는 것]에만 눈이 먼 사람들에게 食傷하고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유일한 통로인 想像이라는 창문을 너무도 값싼 代價로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의 아무런 생각 없이 영화를 감상하고 또 텔레비전을 즐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시각을 만족시켜 주는 문명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문명이 그들에게 누군가의 任意에 의해 조작된 화면을 보여주는 대신 그렇지 않으면 마음껏 날개를 펴 그보다 헤아릴 수 없이 크고 깊은 즐거움을 가져다 줄 想像의 화면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사람들은 감사할 것인가?
한 편의 소설을 읽을 때에 우리들은 活字化된 글자들만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각을 통하여 들어온 그 까만 活字들은 우리들의 뇌리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 우리들의 知性과 感性이 총동원된 想像의 날개를 펴준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을 우리들의 마음껏, 우리들 각자의 좋아하는 기호대로 그 작은 부분, 부분까지도 창조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더불어 울고 웃으며 한껏 우리의 想像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또한 이 때의 즐거움이야말로 순전한 우리의 것이며 創造的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나 텔레비전의 脚色된 화면에 나타나는 소설의 주인공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 任意로 선택한, 우리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주인공의 모습에 마치 독재자에 굴종하는 무력한 백성처럼 획일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 만족해야 한다. 단지 소설을 보는 것보다 편하다는,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부담을 덜어준다는 게으름을 만족시켜주는 하나의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커다란 즐거움이자 유일한 특권인 想像을 포기해버려도 좋은 것일까?
흔히들 열대의 人種이 미개한 이유를 그들에겐 衣食이 해결되어 있어서 그들이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겐 단추만 누르면 펼쳐지는 화면이 있기에 우리가 따로 想像의 화면을 펼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몸을 벗고 사는 열대의 未開人처럼 마음을 벗고 사는 文明의 未開人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사실은 지극히 작은 일례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미 모든 방면에서 너무나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문명의 모든 범주이다. 그리고 문명은 곧 物質의 망령이다. 오늘날 거개의 사람들의 영혼이 이 物質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잇는 황금만능주의, 퇴폐의 온갖 群像, 그리고 모든 부정부패는 바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는 영묘한 무한의 정신적 기쁨을 외면하고 오직 [보이는 것]에만 귀신들린 것처럼 매달려 있는 사람들의 정신적 불구에 기인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보이는 것]은 限界가 다 할 때엔 오직 파멸만이 있으리란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바람이 불 때 사람들은 空氣를 意識한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만 우리는 空氣의 存在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보이는 것]은 바람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空氣와 같다는 사실은 애써 부정하므로 스스로 커다란 悲劇的 웃음거리를 초래하는 것일까? 나는 사람들이 이제는 物質의 망령인 저 거대한 文明의 그림자 속에 가려있는 그들의 영혼을 精神의 맑은 햇볕 속에 드러내기를 원한다. 나는 또한 사람들이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속에서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무엇을 찾아낼 想像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유일한 특권인 想像을 보들레르가
-地上에 추방되면 야유와 함성 가운데서
그의 巨大한 날개는 오히려 걸음을 방해할 뿐-
이라고 그의 詩에서 묘사한 알바트로스의 신세가 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이제는 이 글 처음에 인용했던 파운드의 詩에서처럼 사람들이 껍질 벗겨진 올리브 가지가 되는 것도 또한 이 밝은 文明의 안개아래서 창백한 학살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도 더 이상 보기 싫기 때문이다.
오클랜드 문학회 회원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