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집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4> 엄집

이리역 폭발사고가 났을 때 저는 새까만 쫄병이었습니다. 저는 전주 근처의 어느 산꼭대기에서 군 생활 두 해 겨울을 보냈습니다. 겨우내 눈 속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산꼭대기에서는 물이 귀해 빨래를 할 수 없어 모두 빤스를 입지 않았습니다. 추리닝 차림에 고무신을 질질 끌고 벼랑 끝에 매달린 변소로 뛰어갔습니다. 불침번을 서면서 중유 난로에 눈 녹인 물로 머리를 감고 사타구니를 닦았습니다.


봄이 되자 눈이 녹으면서 길이 열렸습니다
. 밀린 장을 보러 쫄병과 함께 전주에 갔습니다. 주방에서 쓸 빗자루와 쓰레받기, 사병들이 주문한 편지지와 편지봉투, 야간 근무 때 먹을 새우깡이 든 검정 봉다리를 들고 풍남문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끼니때가 되어 눈에 들어온 밥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와집을 개조한, 그래서 테이블이 없이 방에 기다란 상이 차려진 그런 구조였습니다. 여느 손님들처럼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누군가가 물어서 그냥 백반을 달라고 했는데, 잠시 후에 배고픈 두 군인 앞에 수라상이 차려졌습니다. 상 위에는 수십 가지 반찬이 빼곡했고, 찌개와 국이 따로 있었고, 홍어 무침과 계란찜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란 저희는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심으로 주인을 증오했습니다. 어디 사람이 없어서 월급 삼천 원 받는 군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느냐고요.

 

이왕 벌어진 일이어서 저희는 생전 처음 받아본 밥상에 몸을 던졌습니다. 밥상을 모두 해치운 후, 쫄병을 먼저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군화 끈을 묶으며 도망칠 기회를 노렸습니다. 허리를 숙인 채 눈알을 굴리고 있던 제게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가 밥값을 내라고 했습니다. 문을 가로막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둘이니까 육백 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할머니가 다른 손님과 착각을 했다고 생각했고, 얼른 육백 원을 내고 난 저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도망쳤습니다. 금방이라도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돈을 더 내라고 다시 부를 것 같았습니다. 목덜미가 서늘하도록 뛰었습니다. 미원탑 뒷골목 설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쫄병을 보고서야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날 저녁, 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육만 원짜리 식사를 하고 육백 원을 냈다고, 신출귀몰할 작전과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단련된 주력으로 붙잡히지 않았다고 떠벌렸습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게 어디냐고 묻는 고참병에게, 풍남문에서 예수병원 쪽으로 가는 골목 안에 있는 허름한 기와집이라고, 한 번 가보라고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난 고참병이 말했습니다. 으으응, 엄지입, 거기 원래 삼백 원이야.

 

 단골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고참들 전역 회식도 하고, 생일잔치도 하고, 면회 온 친구들도 데려갔습니다. 가끔 서울 갈 고속버스 차비를 얻기도 하고, 볼따구니가 퉁퉁 부어서 치과에 갈 치료비를 빌리기도 했습니다. 혼자 가도, 막걸리 한 병을 주문해도 수십 가지 반찬이 따라 나왔습니다. 하루에 두 번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찬이 떨어졌다고 하면 두말없이 채워주었습니다.

 

 하도 미안해서, 어느 날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이렇게 장사하는데 뭐 남는 게 있나요?

 할머니는 저를 이건 또 뭐하는 물건인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남을라고 밥장사하간디? 나누어 묵자는 것이제. 할머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앉아 나물거리를 다듬었습니다.

 

 밥은 팔고 사는 물건이 아니고, 나누어 먹는 것이라던 할머니의 말씀은 사십여 년 가까이 지났는데 군번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지나는 길에 몇 번 가보았지만 미원탑이 없어지듯 그 골목에서 엄집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누구나 그렇지 않아!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 하면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겁한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버텨왔습니다. 가슴살이 늘어지고 배가 나오고 팔다리가 가늘어져서야, 그동안 뭘 했나 텅 빈 지난날을 뒤돌아보면서 문득 지금의 내 나이였을 할머니가 생각났고, 그 삶과 마음을 되새겨 보고 싶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집 떠났다가 돌아오는 자식처럼 반겼던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금도 자라지 못하였고, 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 비틀어진 심사를 바로 잡기란 얼마나 힘든지요. 벌레들이 허물을 벗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지요.

 오늘, 카빈총을 분해하듯 그때의 감회를 책상 위에 펼쳐놓았습니다. 회한의 틈바구니에서 할머니의 마음을 찾아보았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할머니의 그대로를 쓰고 싶습니다.

작업실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오클랜드문학회 소설수필 등 순수 문학을 사랑하는 동호인 모임으로 회원간의 글쓰기 나눔과 격려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높이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문의 021 272 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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