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사생활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9>문학의 사생활

오문회 0 4147
예전에, 패왕별희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장국영이 우희로 분장하여 미모를 뽐냈지요. 불우한 출신들인 어린 연습생들이 혹독한 매질과 훈련을 피해 한 밤중에 도망을 칩니다. 아이들은 미로와 같은 골목을 무작정 달려갑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려는지 그들은 모릅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어느 극장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자기들과 같은 배우들이 패왕별희를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수많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너무 잘 합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어린 배우들이 눈물을 뿌리며 엉엉웁니다. 얼마나 맞았으면, 얼마나 맞았으면 하면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을 창작이라고 합니다. 사전에서 창작은 '예술작품을 독창적으로 만들거나 표현하는 일, 또는 그 작품'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예술은 '어떤 재료와 양식, 기교 등에 의하여 미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활동 또는 그 신물'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만 정의되어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정한 재료와 양식, 기교 등으로 미를 창조하고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작 누가, 어떻게, 왜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예술가들이란 춥고 배고픈 인간으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천민 계급에 속해 잇었으며, 열정이나 솜씨로 나타나는 그들의 특질은 역마살이나 무슨 ~~기로 비웃음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거래되는 예술품들은 대개, 어느 기록에 의하면, 서캐같이 비루하고 버러지 같이 천한 것들이 죽지 못해 살아보겠다고 땅바닥에 엎드려 흙을 파내고, 짐승의 털을 발라내어 가죽을 벗기고, 무르팍이 닳도록 그리고 그린 것들이라고 합니다. 또한 어느 경지에 다다른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렇게 할 수 있는 솜씨와 안목을 기르기 위해 피를 말리고 뼈를 깎아내고 살을 져며내는 고통의 세월을 감수해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들은 손 끝에 먼지 한 톨 묻히지 않고 살아가는 고상한 분들에게 전해져서 소중하게 쓰여졌고, 이제 귀중한 골동품이 되어 비싼 값으로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천한 것들이 만든 것이라고 천대하지 않습니다. 그 예술품이나 골동품들의  어느 부분에서도 천격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 잇어서, 문학의 영역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글쓰기란 피를 말리는 고통의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그 정성과 고통이 읽는 자들에게 전달되고 통했을 때, 비로소 문학이란 것을 들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아르튀르 랭보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천재시인이라고 하지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구역질을 할 것 같아서 아직까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은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보면 글쓴이의 인격이나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되는 줄 압니다. 달리 생각하면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또는 올바른 생활인이 좋은 글을 쓴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동의합니다. 모범적인 바란생활을 하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훌륭한 글을 쓴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모범적이고 바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쓴 좋은 글은 교육계로 보내져야 할 것이지, 모순 덩어리인 인간의 근복적인 문제를 파헤쳐 풀고자 하는 문학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생활로 가늠할 수 있겠지만, 작가는 작품으로만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하고 그렇게 힘이 마땅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예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김수영 선생이 평소에 밥상을 울러메쳤다고 해서, 마누라를 향해 밥상을 울러메친 사람이 쓴 시라는 이유로 선생의 시들이 달리 평가되어야 마땅한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 도박꾼이자 간질병 환자가 쓴 작품들이 기피해야 할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야 하는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한편 파스테르나크는 실제로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작품 속으로 옮겨갑니다. 혁명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부인과 애인을 오가며 방황하는 시인이자 의사인 지바고를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는 노벨상을 거부합니다. 그런 작품을 그런 사람 또는 그런 여건 속에서 쓰여졌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겠으나, 편들어 감싸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비난받거나 배척당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문학작품이 꽃이라면 어떤 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고관대작의 사랑방, 양지바른 창가에 피어있는 난 같은 것있까 아니면 탁한 물의 더러운 흙에 뿌리를 박은, 그런 꽃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접시바닥처럼 얕고 깃털같이 가벼운 잡소리였습니다.

작업실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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