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향기를 나누며 11>거품 걷어내기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11>거품 걷어내기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게릭 올슨이 연주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7 D장조 D850이다.
이게 뭐야! 하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식의 천진함과 즐거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곡이었다.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이 전부 모이면 그 많은 수가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놀이는 딱 하나였다.
두 편으로 갈라 같은 편끼리 쭉 늘어서서 손을 맞잡고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하면서 상대편을 향해 따지듯이 발을 맞추어 돌진해가던 그 놀이 말이다.
1
악장의 시작은 그처럼 뜬금없었고 시끄러웠다.
 
게다가따따따따 따아다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다른 테마를 중간에 넣은 어색한 혼란스러움과 정신 없는 흐트러짐 때문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 밖에 나오질 않았다
.

 

 그러다 2악장 con moto에선 마음이 좀 놓인다.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고,
어느덧 두 눈을 감고 음악 바깥의 소리도 끌어들일 수 있는 여유로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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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도닥여지고,
나긋나긋한 선율에 몸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해진다.
마치 햇살이 따갑지도 야박하지도 않게 알맞게 들어오는
유리 온실 안에서 향이 좋은 꽃차를 마시는 듯한 편안한 기분이 든다
.
그렇지, 그럼, 그럼, 음악의 효용이란 이런 것이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낭만적인 선율이 흐른다
.
하지만 후반부에는 졸업식 송가 같기도 하고,
어느 작은 섬나라의 애달픈 국가 같기도 한 멜로디가
 끊어질 듯 이어져 계속 듣다 보니 슬슬 지루해졌다
.

 

 역시, 내 맘대로 하기로 마음먹은 슈베르트 씨가 이를 가만 둘 리 없다.
등짝을 한 번 짝하고 갈기는 것처럼 3악장의 즐거운 무도곡이 시작된다.
살짝 졸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향해 그가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 이제 모두 일어나 즐겁게 춤을 추는 겁니다.
옛날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경쾌한 스텝을 밟아보세요.
어깨에 힘을 빼고, 발은 가볍게 하고, 입가엔 미소를 띄우고,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4악장 론도는 상쾌한 바람이었다. 가볍고 빠른 멜로디에 귀가 즐거웠다.
! 이것이 슈베르트구나, 이것이 비엔나의 그 부드러운 밝음이구나, 하듯이.

 만일 이 긴 피아노 소나타 D장조를 리히터의 연주로 듣는다면 훨씬 덜 지루할 지도 모른다.
리히터는나 진짜 빨리 치지?” 하며 자랑하듯이 숨 쉴 틈도 없이 1악장을 질주한다.
 
다행히 강약 조절 또한 자랑하듯이 잘 한다. 하지만 듣고 있으면 숨이 차다.
그에 비하면 빌헬름 캠프는 바이엘 하권을 들고 얌전히 건반을 두드리는 진지한 소년 같다.
이 곡은 연주가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다. 무언가 완전하지 않은 느낌이다.
두서가 없고 정리가 안 된다.

 

 슈베르트는 31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2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 중 마지막 두 해에 쓴 19,20,21번은 꽤 좋은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17번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에 의하면비오는 날 운동화정도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중에서) 길고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곡 자체에 구조적 결함도 눈에 보일 정도여서
아무리 잘 쳐도 본전이나 건질까 말까 해 연주가들이 꺼리는 곡이었다
.

 그럼 슈베르트는 이런 곡을 왜 썼을까?

 하루키가 슈베르트의 자서전을 읽고 내린 결론은그저 그런 곡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생활의 곤란이 생긴다 해도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민폐가 될 정도의 고집으로 여겨진다 해도,
그는 그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상을 자연스럽게 한 국자 퍼서 악보에 옮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실험적인 자유로움과 당당함이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하루 종일 들은 날, 그 산만함 속에서 나는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였다.
멸치 다시 물에 된장을 풀고 뚜벅뚜벅 썬 호박, 양파, 감자를 넣었다. 숟가락을 들고 서서 잠시 기다렸다.
곧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포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거품이었다.
조금만 더 뜸을 들이면 딱 한 숟가락에 퍼내기 좋을 만큼의 거품이 모일 것이다.
이때부터 모인 거품들을 따박따박 걷어내면 끓어 넘칠 일도 없고, 잡냄새도 없는 찌개가 끓여진다.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란 바로 이거품 걷어내기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라는 것이하고 떠오를 때가 있다.
 
참을성 있게 지켜보고 있으면 그것들이 순간 딱 한 숟가락 뜰 만큼이 모인다.
그러면 어딘가에 적어놓아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긴다.
 
슈베르트가 알프스 산줄기의 눈이 녹아 흘러 내리 듯이 떠오르는 악상을 자연스럽게
한 국자 퍼서 담아낸 것처럼 말이다
. 의미 없는 글이라 해도 형식에 맞지 않는 글이라 해도
나는 그 꺼질듯 한 거품들을 조심스레 덜어 내어 나의 문장으로 만든다
.
 
끓어 넘쳐 없어져 버리기 전에, 가라앉아 냄새 나는 앙금이 되어 버리기 전에
민폐가 되든지 놀림거리가 되든지 간에 우선 쓰고 본다
.

 

 나의 글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7번이다. 격을 갖추지 못했고, 어이없을 정도로 제멋대로이고
불완전하다
.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생각들이 모인 불완전한 묶음들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계속 끄적거릴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좋아하는 책 <해변의 카프카>의 오시마상의 말 때문일 것이다.

 “어떤 종류의 완전함이란 불완전함의 한없는 축적이 아니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그것이 나를 격려해 주거든.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겠어?”

간서(看書

)
오클랜드문학회 회원


오클랜드문학회는 시, 소설, 수필 등 순수 문학을 사랑하는 동호인 모임으로 회원간의 글쓰기 나눔과 격려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높이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문의>021.272.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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