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힘이 세다

손바닥소설


 

<글의 향기를 나누며 15> 분노는 힘이 세다

오문회 0 2168
그날 미란이 집을 나선 것은 순전히 그녀 본래 성격과는 어디로 보나 맞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걸까? 그녀가 아는 어느 여자처럼 일생을 아예 집 밖을 나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미란도 그 집보다 조금 큰 동네 밖 외에는 나서지 않는 얌전한 여자였다.

어쨌거나 그녀가 그 날 아침 눈뜨자마자 동네 도서관으로 직행하여 북쪽에 있는 모든 숙박 시설을 알아본 것은 10년도 넘는 이민 생활에서 그녀 나름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성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행복한 가족 여행이나 친구와 가는 그런 여행과는 거리가 먼 가출을 감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도서관 직원은 뉴질랜드 모든 모텔과 홀리데이파크 숙박시설 정보가 수록된 책을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어쩌면 살짝 눈물이 비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아는 척 안 해 준 것 또한 고마웠다.

그래서 그 날 그녀는 일주일의 숙박을 예약할 수 있었고, 그녀처럼 밤사이 가출을 해서 맨몸으로 옆 빌딩 호텔로 직행한 ‘티나 터너’처럼 티나의 CD 하나만을 일주일 내내 들으며 베이 오브 아일랜드로 올라갔다. 

막상 가출하고 보니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은 별로 없었고, 다들 적어도 그녀가 속해있던 세상보다는 친절해 보였다. 그래서 떠나 온 것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었다. 그녀 혼자 눈 뜨고 일어나 걷던 어느 바닷가, 가장 고독하고 외롭던 시간을 채워주었던 그 기억들. 무엇보다 그녀 없이도 조화롭게 존재하던 세상들에게 그녀가 있음을 알려 준 것이 잘한 일이리라.

그 가출의 시간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가장 큰 것은 가출은 결국 집보다 불편하다는 것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설사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것이라는 것도 재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고 그 사이 심한 분노가 슬슬 그 힘이 약해져 원인은 남아있으나 더는 화내고 있을 정신력이 없는 것도 작용했다.

결국 그래서 타협은 그녀 혼자 했고 가출 전이나 별반 달라진 것 없는 일상으로 조용히 복귀했다. 그 후 그녀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다시 가출하고 싶은 정도의 분노가 생겨도 그 춥고 불편했던 잠자리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남을 나가게 할지언정 그녀가 나가지는 않아야 한다는 철학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 이후 5년여가 흐르고 보니 정말 동네 밖을 나가보지 못하고 있다. 노인이란 자기 동네 냄새만 맡는 사람이라더니 그녀도 그렇다면 노인에 속하리라. 하지만 한국처럼 하다못해 괜찮은 설렁탕집이라도 어디 있으면 ‘붕’하고 갔다 오련만 그런 것도 없고 하니 동네 앞 바닷가만 줄기차게 오르내리고 있다.

누가 다시 그녀를 분노하게 해 주면 고맙겠다. 남을 화나게 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러나 정말로 누군가 기꺼이 그런 역할을 감수해준다면 고맙겠다. 다시 한 번 에너지가 넘쳐 혼자 운전대 잡고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면 밤 벌레 소리 친구 삼아 작가 흉내도 내 볼 수 있으련만, 이 세상이 어디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렇게 안 가 주니 미안하다고,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해도 괜찮겠냐고 미란은 묻는다.


어릴 적, 그녀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기억 중 하나는(여기서 소중하다는 것은 기억되는 것이 별반 없어서일 뿐이지만) 역시 분노에 관한 것이다. 얼마큼 어려선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그녀의 ‘코찔찔이’란 별명과 더불어 세 네 명의 여자애들에게 포위당하여 간지럼을 당하곤 했던 기억이다. 이것은 거의 고문수준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어떻게 해서 왜 그 가해자 집단에 끼지 못하고 맨날 놀림을 받거나 간지럼을 당하거나 하는 역할을 수행했는가 말이다. 그 점에 대해 힘있게 대항하지 못한 그녀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어린아이 자체의 잘못 같진 않다. 

어린 시절 그녀는 얼굴이 좀 까맣고, 남자아이처럼 상고머리를 하고 코를 잘 흘리는 아이였다. 크리넥스 같은 고급스러운 휴지는 상상에서도 없던 시절, 코는 닦기도 전에 지저분하게 들러붙었고 가게일 하느라 바쁜 그녀의 부모는 그녀 친구 희경이엄마처럼 시간 나면 친구를 불러 화투 칠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옆집 제재소 딸 은정이는 잘 땋은 머리에 깔끔한 서양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툭하면 눈을 까뒤집어 보이는 일하는 오빠도 빽으로 가지고 있었다. 물론 두 살 위인 주인집 명옥이 언니도 남에게 놀림당할 신분은 아니었다.

오빠 언니가 반 다스는 되게 있었고 성질 깐깐한 할아버지 같아 보이는 아버지까지 있었다. 거기에 몇 명 엑스트라 같은 조무래기가 있었을 텐데, 아무튼 명옥 언니는 대장이었다. 명옥 언니는 소꿉장난이나 하는 소녀다운 아이는 아니었고 주로 다방구 같은 스케일 큰 놀이를 즐기는 남자 같은 언니였다.

하지만 가끔은 그네들은 방안에서 오글오글 모여 놀았는데 주로 두 다리를 사이사이 놓고 ‘네 다리 내 다리……’하며 노래를 부르는 놀이었다. 그러다 노래가 끝날 때 걸리는 다리 주인이 벌을 받는 놀이였는데 집단 꼬집기나 간지럼 태움을 당하는 벌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시점에선 미란이 간지럼을 집단으로 당하고 있게 된 것이었다.

그만하라고 애원했던 것도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묻혀, 또는 울면서 웃느라 말로 되어 안 나오고 다만 이러다 숨넘어가 죽는 거구나 했다. 가끔 지금도 미란은 그때 보란 듯이 죽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하게 여겨져서 진저리를 칠 때가 있다.

마치 사춘기 때 내가 죽어버리면 엄마나 아버지가 얼마나 후회가 될까 하며 그 모습을 상상하며 울곤 하던 그것처럼 그때 폼나게 죽든지 혹은 기절이라도 해서 저 못된 아이들을 된통 혼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금 너무나 후회되고 억울한 것이다.

그랬으면 저 남대문 시장의 순대 가게 돼지의 웃는 얼굴처럼 시체가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녀 몸인지 마음인지 어딘지 깊은 곳에서 벌레처럼 웅크리고 분노하며 숨 쉬고 있는 저 어린 영혼……

크리넥스가 나오기 전에 세상에 보내신 조물주에게 화내야 하는지, 아니면 그 당시 셋방살이해서 간지럼을 당하게 한 지금 80이 넘으신 부모에게 화내야 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뭔가 훤칠하게 잘 나지 못해 늘 당하고 사는 것 같은 자신에게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 일 하나 여태껏 삭히지 못하고 있는 성숙되지 못한 영혼에 화내야 하는 것인지 오늘은 꼼꼼히 따져봐야겠다고 미란은 다짐하는 것이다.


오클랜드문학회
오클랜드문학회는 시, 소설, 수필 등 순수 문학을 사랑하는 동호인 모임으로 회원간의 글쓰기 나눔과 격려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높이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문의 021 272 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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