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향기를 나누며 30> 내가 꿈꾸는 친구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 입지도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 이 문장. 흔해서 그리운 문장.
여고 교문 앞, 하굣길에 매일같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이아가라, 나이아가라”
나이아가라는 노란색과 분홍색의 플라스틱으로 된 임시 파마 집게이다.
가로세로 5센티미터쯤 되는 구불구불하고 납작한 그리고 허술한 미용도구였다.
어떻게 하면 짧은 상고머리라도 튀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늘 거울만 보던 여고생들의 얄팍한 주머니를 홀랑 뒤집게 하는 유혹의 소리 ‘나이아가라’.
젖은 머리를 얇게 펴서 나이아가라로 단단히 집어 놓고 잠을 자고 나면 파마를 한 듯 머리카락이 구불거렸다.
물론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아름다운 긴 머리에 하면 딱 좋겠지만, 귀밑 삼 센티미터의 짧은 머리라도 우선 파마를 시켜놓아야‘ 난 너랑 달라’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랬다.
너무 다른 건 싫고 너무 똑같은 건 더 싫은 여고생들만의 암묵적 세계관이 있었다.
친구는 파란 방수천 위에 전시된 나이아가라와
“야, 나 이거, 나이아가라, 한 번 해볼까? 학주한테 걸리면 뒈지겠지?”
나는 귀 뒷머리를 잡아당겨 구루뿌를 말아보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응.”
“그럼 속머리에만 해볼까? 살까? 말까?”
“야, 그냥 똑딱핀하고 연습장이나 사자. 이번엔 누가 더 빨리 다 쓰나 내기하자고.
중간에 찢어내기 없기다.”
소심했던 나와 내 친구는 그 싸구려 나이아가라를 한 번 못 샀다.
나이아가라를 백 번 정도 만지작거리고는 결국 그 옆에 재생지로 만든 스프링 연습장을 집어 들기 일쑤였다. 그 스프링 연습장은 어느 공장에서 나오는 것인지, 표지에 늘 시나 짧은 문구와 함께 엉뚱한 사진들이 있었는데, 그중 내가 가장 많이 사들인 연습장 표지에 실린 글이 바로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백 번을 만지작거렸던 나이아가라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 두 문장만 달랑 쓰여있는 연습장을몇십 권이나 샀었는데도 전문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치 이 두 문장만으로도 나는 지란지교를 다 꿈꾸고 깨어난 사람처럼 굴었다.
두 문장만 들어도 아! 그거!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아니야, 하면서 알은 체를 했으니 말이다.
나이 사십을 바라보며 추운 겨울 문턱에서 드디어 나는‘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장소는 아쉽게도 월드컵 축구 중계방송이 크게 틀어져 있고, 여섯 명의 꼬맹이들이 생일파티인지 뭔지를 하느라 소란스러운 버거킹의 구석 자리에서였다.
하지만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갖고 싶어졌다. 유안진이 꿈꾸는 친구라는 사람을 뭉클하도록 내 곁에 두고 싶어졌다.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한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여고 때 내가 이 글을 백 번을 읽었대도 나는 오늘의 이‘ 갖고 싶음’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여고 때 나의 친구는 인품이란 것을 말할 나이가 아니었고, 그저 내 사사로운 인생 고민을 떡볶이 소스에 김말이 튀김을 찍어 먹으며, 응응 그래그래, 하고 맞장구 쳐 주는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였으니 말이다.
이 글이 지금 내게 이렇게 성큼 다가온 것은 아마도 지금의 내가 필요했기 때문일 테고, 이제야 내게 친구란 존재의 감사함을 제대로 받아들일 마음 밭이 마련된 것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니라 이 책이 나를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때 나를 찾아온 당차고 굳은 심지의 제인 에어처럼, 스무 살 때 나를 ‘봄’으로 만들어줬던 미도리처럼(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이십 대 중반, 뭔가 빠뜨리고 온 것 같은 불안감으로 초조해 했던 젊은 여류 화가처럼(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번잡스러움에 끌려다니다 지친 삼십 대의 나를 찾아온 랄프처럼(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레이몬드 카버) 가끔 이렇게 책이 나를 발견해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 나를 노크한 책들은 어김없이 나를 무너지게 했고 울게 하였다.
유안진이 꿈꾸는 친구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그렇다. 친구라는 것은 그렇게 문득, 불현듯 찾아오는 그리움이다.
친구와의 추억은 빗물 웅덩이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힐 때, 문득. 겨울 목도리를 꺼내려고 서랍장을 열다 발견한 손가락 장갑에서, 문득. 고춧가루가 섞인 소금 주머니와 함께 가지런히 썰려 포장되어 있는 순대를 집다가, 문득, 그리고 대책 없이 찾아온다. 그‘ 보고 싶음’과‘ 볼 수 없음’에 까닭 없이 눈물이 난다.
나의 친구들은 퉁퉁 불은 국수가락처럼 잘뚝잘뚝 끊어져서 젓가락을 넣고 아무리 휘휘 저어봐도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던, 나에게 눈웃음을 보내던, 같이 후루룩거리며 컵라면을 먹던, 진실 게임을 하다 자기사랑을 들켜서 울던, 친구들이 이젠 하나도 없다.
그들은 다 나를 잊은 걸까.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움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한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그리워하는 친구들이 이제 나를 잊었다 해도 괜찮다. 이제 나를 밉다 해도 괜찮다.
어쩌면 우린 추억 속에서 좋은 친구로남을 것이고, 그리움이 그 추억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니 다 괜찮다. 다행히 나는 아직 새로운 친구를 사귈 많은 날이 남아있다.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친구들을 사귀게 될 것 같다.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은, 그런 친구들을 사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나 혼자는 갈 수 없는 아득한 별까지 같이 가줄 부드럽고 세련된 친구들을 사귀게 될 것 같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 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은 모두 어느 시점에선가 이런 친구가 눈물 나도록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나도 당신도 그들도 예외가 아니다.
간서_오클랜드문학회 회원
오클랜드문학회는 시, 소설, 수필 등 순수 문학을 사랑하는 동호인 모임으로 회원간의 글쓰기 나눔과 격려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높이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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