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역사 이야기]뉴질랜드 지폐 인물로 뉴질랜드 역사 알아보기(2)

손바닥소설


 

[뉴질랜드 역사 이야기]뉴질랜드 지폐 인물로 뉴질랜드 역사 알아보기(2)

지폐이야기 0 3158

매일 쓰고 있는 뉴질랜드 지폐 인물 알고 계세요?
뉴질랜드 지폐 인물로 뉴질랜드 역사 알아보기(2)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뉴질랜드 지폐 인물 중 20불과 5불의 인물은 많이 알고 있지만 10불과 50불, 100불 지폐 인물은 많은 교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5 달러 지폐에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힐러리경과 20 달러 지폐에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가 있다.
10달러 인물은 뉴질랜드 여성들이 세계 최초로 선거권을 얻는 데 앞장선 케이트 셰퍼드 (Kate Sheppard)이고 50 달러 인물은 마오리족 최초의 뉴질랜드대학 졸업생이자 사회운동가인 아피라나 낭아타(Apirana Ngata), 100 달러 인물은 최초로 외국 유학을 떠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핵 물리학자 러더퍼드(Rutherford of Nelson)이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는 20불과 50불, 100불의 지폐 인물을 알아 보기로 한
다.


20달러 –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자 뉴질랜드 여왕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2세가 20달러의 지폐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년 4월 21일 - )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바베이도스, 캐나다, 자메이카,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루시아, 바하마, 그라나다, 세인트키츠 네비스,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버뮤다, 벨리즈의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Elizabeth Alexandra Mary Windsor)이다. 호칭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전하(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of the United Kingdom)’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공식 명칭은 ‘엘리자베스 2세 전하, 하느님의 가호 아래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그리고 기타 해외 영토의 통치자, 영국 연방의 수장, 신앙의 수호자(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이다.
또한 함대 사령 장관(Lord High Admiral), 맨 섬의 영주(Lady of Mann)와 피지의 추장(Paramount Chief of Fiji), 랭커스터 여공작(Duchess of Lancaster), 노르망디 여공작(Duchess of Normandy)의 직함도 보유하고 있다.




50 달러 - 마오리족 최초 대학 졸업생이자 사회운동가 Apirana Ngata
아피라나는 1874년 7월 3일 기스본에서 북쪽으로 175km 떨어진 테 아라로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오리,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아피라나는 장학금을 받고 캔터베리대학에 입학했다. 1893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마오리로는 최초 대학졸업생이었다. 그 다음해에는 정치학 석사 학위를 땄다. 3년 후엔 오클랜드대학에 입학, 법학 학사를 따냈다. 그리고 법조인이 됐다.  아피라나는 마오리들의 경제적, 사회적 개선에 무엇보다 앞장을 섰다. 각종 모임에 나가 마오리들이 인간답게 제대로 대접받으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으며, 신문 매체 등을 통해 마오리의 권익을 주장하기도 했다. 1900년 초, 아피라나는 내무부장관 제임스 캐롤과 함께 법안 작업에 들어갔다. 바로 마오리토지관리법과 마오리위원회법이었다. 이 법안 제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아피라나는 국회에 들어갔다. 1905년 서른 한 살의 나이였다.
국회에서 그는 돋보인 의정활동을 벌였다. 초선 국회의원이었지만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지역구 주민은 물론 국민들에게 '뛰어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피라나는 마오리들도 스포츠를 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 주었고, 오늘날 마오리의 춤을 대표하는 하카를 대중화시켰으며, 마오리 카빙(손 조각)을 국가 차원에서 계승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아피라나는 제임스 캐롤(첫 마오리 국회의원)과 마우이 포매레(마오리 의사)에 이어 세번째로 기사 작위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100 달러 - 최초 외국 유학생, 노벨 화학상 수상자 Rutherford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871년 8월 30일 뉴질랜드 넬슨의 스프링 그로브에서 7남 5녀 가정의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러더퍼드의 아버지 제임스 러더퍼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4살이 되던 1842년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어네스트 러더포드는 각종 장학금을 휩쓸면서 중등학교(College), 대학 학사(BA), 석사(MA) 과정을 마쳤다. 칼리지 때 최우수졸업생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어 세계 박람회 기념 장학금을 받아 영국 캠브리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0여 년 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러더퍼드는 뉴질랜드인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원소 붕괴 및 방사성 물질의 화학에 관한 연구’(Disintegration of elements and the chemistry of radioactive matters)로 상을 받았다.
어네스트 러더포드가 ‘핵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방사선 물질의 붕괴와 변환 ▷라듐으로부터 나오는 입자들 ▷원자구조에 관한 이론 ▷인위적 원소 붕괴 등에 관해 탁월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1919년 어네스트 러더포드는 캠브리지대학 케빈디쉬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다. 그 후부터 그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중수소의 예언, 디락의 양전자 이론의 발전, 제임스 차드윅의 중성자 발견 등 1930년대 물리학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어네스트 러더포드 본인 업적에 못지않게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가 가르친 제자 중에 6명이 노벨상을 수상했고, 그가 이끌던 연구소 출신을 따지면 30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이 노벨상의 영예를 안게됐다. 21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뉴질랜드, 러시아, 캐나다, 스웨덴 등 네 나라의 우표인물로 선정될 만큼 학식과 존망을 함께 받은 어네스트 러더포드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쉽게도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37년 10월 그의 나이 66세 때였다. 러더포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뉴턴과 켈빈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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