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4) 예수의 흔적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4) 예수의 흔적 <갈라디아서 6:11~18>

일요시사 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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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런 선언을 합니다. 17절 후반절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에게는 바울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예수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는 낙인입니다. 시골에서 대량으로 사육하는 소나 돼지를 보면 귀걸이를 하나씩 달고 있습니다. 거기에 색깔도 있고, 번호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노예에게도 귀를 뚫거나, 몸의 어떤 부분에 인두 등으로 자국을 내어서 노예임을 표시했습니다.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흔적이 이런 의미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 다시 말해 “나는 예수의 종이다.” “나는 나 바울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들어 사용하고 계시기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오롯이 새겨져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들에게는 어떤 흔적이 새겨져 있습니까? 또한 어떤 흔적을 새겨가길 원하십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우리가 지나간 그 자리에, 우리의 이름이 불려지는 그 자리에 어떤 흔적이 남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흔적을 새겨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자리마다,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모든 자리마다, 내 이름이 떠나간 그 자리마다, 예수의 향기를 드러내는, 예수의 흔적을 새겨가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바울이 고백하는 예수의 흔적, 우리 역시 믿는 자로서 우리 삶에 새겨가야 할 예수의 흔적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고난의 흔적이 새겨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입니다. 율법적으로는 바리새인입니다. 지식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는 가말리엘 문하의 생도입니다. 신분적으로는 로마의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고난의 상징인 동시에 부활의 상징, 영원한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우리가 지금 그리는 십자가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사형제도입니다. 무력과 실패와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십자가가 나의 가장 큰 자랑이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내가 만났고, 그 십자가를 내가 지금 짊어지고, 그 십자가를 전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흔적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의 실제 삶을 보십시오. 삶 자체에 있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빼고는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뭐 대단한 십자가 못자국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를 위해, 주의 몸 된 제단을 위해 충성하는 것, 그러다가 조금 손해도 보고, 어려움도 겪게 되고, 욕도 먹고.. 그게 바로 고난의 흔적을 새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당당히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충성하고 헌신함을 통한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새겨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흔적을 새겨가야 합니다. 그런 말 들어보셨죠?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져 가는 것,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새겨가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기도하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야 믿음의 흔적이 새겨지는 게 아닙니다. 모세처럼 지팡이를 드니까 홍해가 갈라져야 믿음의 흔적이 새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주어진 자리에서 힘을 다해 예배하는 것, 찬양하는 것, 기도하는 것,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주를 위해 헌신하고, 가족을 향해 사랑하고, 성도들간에 섬겨주는 것, 피곤해도 주방에서 열심히 애찬 준비하시고, 또 기쁘게 설거지로 봉사하시고, 교사로 사명 감당하고, 일찍 와서 하나님께 찬양 드리고...이 모든 게 다 믿음의 흔적을 한 땀 한 땀 새겨가는 과정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할례와 무할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요?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딱 한 마디로 이겁니다. “눈에 보이는 할례가 중요하냐? 네 마음에 예수의 흔적이 새겨지는 것이 중요하냐?” 우리에게 새겨진 믿음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어떤 믿음의 흔적을 새겨가야 하겠습니까? 

  지금도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 예배를 통해 믿음의 흔적을 또 하나 새겨가는 것입니다. 속회에서, 선교회에서 모여 예배하고 헌신함을 통해 믿음의 흔적을 새겨가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신앙의 자리에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고 봉사함으로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믿음의 흔적이 새겨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특별히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주를 위한, 주의 몸 된 제단을 위한 충성과 헌신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더 힘껏 믿음의 흔적을 깊이 새겨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영광의 흔적을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가장 큰 중심이 되는 말씀은 17절 말씀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은 앞서 여섯 장에 걸쳐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에, 마지막으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앞선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어서 마지막 18절에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서 “형제들아”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은 바울과 같은 뜻을 품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마음을 품으면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과 같이 예수의 흔적을 새겨가는 자들에게, 고난의 흔적, 믿음의 흔적을 새겨가는 자들에게 평강과 긍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예비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죠.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의 흔적, 우리의 믿음의 흔적을 결단코 작게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고난의 흔적은 새겨가는 것이고, 두 번째 믿음의 흔적 역시 새겨가는 것인데, 마지막 세 번째 영광의 흔적은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요? 영광의 흔적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에게 주실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흔적, 믿음의 흔적을 내가 열심을 다해 새겨가다 보면 나의 삶에 영광의 흔적이 새겨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영광의 흔적은 내가 새겨가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죠.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나와 같은 일을 할 것이요,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가능하십니까? “예수님과 같은 일” 이게 끝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더 큰 일” 가능하십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우리가 주를 위해 작은 일 하나 하는 것도 그렇게 크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쓴 편지인 디모데후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예수의 흔적을 새겨간 바울 자신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져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흔적에 대한 사모함이죠. 

 

  이것이 바울에게만입니까?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주님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모든 자에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십자가 붙잡고 고난의 흔적을, 믿음의 흔적을 열심히 새겨가고 있는 우리들에게입니다. 우리 주님 예비하신 영광의 흔적을 사모하고,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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