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62) 무엇으로든지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62) 무엇으로든지 <누가복음 19:28~40>

저는 어렸을 적에 연탄을 땠습니다. 연탄에 뚫린 구멍을 딱 맞추면 화력은 좋지만, 금방 타 버리기에, 밤이 되면 연탄 구멍을 살살 어긋나게 맞추어서 연탄이 밤새도록 천천히 타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는 그냥 버리지 않고, 또 한 편에 모아놓죠. 그러다가 눈녹은 길이 질퍽거리면, 그곳에 던져 놓고는 신나게 그 위에 뜁니다. 그러면 연탄재가 다 으깨지면서 질퍽거리던 땅이 어느 정도 메꾸어져서 사람들이 다니기 편한 길이 됩니다. 연탄은 스스로 한 덩이 재가 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다 타서 하얀재가 되어도 그대로 버려지는 게 아니라,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길에 으깨어져서 사람들이 미끄럽지 않게 지나갈 길을 만들어 줍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온 몸을 불태우신 그 사랑, 온 몸에 채찍을 맞으시고, 머리에 가시면류관까지 쓰시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심으로, 완전히 으깨어진 그 모습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 사랑.  

  

오늘 종려주일,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십니다.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어떠한 배신과 조롱과 비난과 고통과 아픔과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지 다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온 몸을 불태우시기 위해, 온 몸을 으깨시기 위해, 예루살렘성을 향한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걸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졌고, 그 걸음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길, 천국의 길이 열려졌습니다. 이 시간 함께 종려주일에 담겨진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사랑 받은 자로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함께 결단하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십니다. 가시는 길목에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마을이 거의 가까워져 갈 때 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명을 불러서 그 마을에 앞서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두 명을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텐데, 그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혹시 누군가가 “나귀 새끼를 왜 가져 가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일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죠. 

  

예수님께서 보내신 두 명의 제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과연 어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가지러 갔을까? 아마도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 같은 인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격상으로 보면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할만도 했겠지만,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곁을 떠나서는 안되겠죠. 야고보나 요한 같은 경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 나라가 임하실 때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서게 하옵소서.” 그렇게 부탁까지 하는 이들이 이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 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입니다. 그럼 누가 마을에 갔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복음서에 이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제자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들도 다 예수님과 함께 동역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능을 주실 때에,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에게만 주신 게 아닙니다. 열 두 명의 제자 모두가 같은 권능을 받고, 같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다함께 고난도 겪었고, 다함께 풍랑도 지내왔고, 다함께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도 받았습니다. 우리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두드러지게 기억하지만, 다른 제자들 역시 함께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였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바라봤으며, 예수님의 승천하심 속에 약속의 말씀을 받았고, 함께 모여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주의 십자가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럼 제가 오늘 이 두 제자, 나귀를 끌고 오려고 먼저 저 맞은편 마을로 간 제자들이 누군가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이유가 뭘까요? 저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저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귀한 사명을 감당했던 두 명의 제자와 같이,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럼에도 다만 주님 가시는 길이라면 내가 그 길을 준비하길 원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의 사명 감당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내 등에 태운 자입니다. 

 

누군가요? 나귀 새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두 명의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 하필 나귀새끼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가랴 9장 9절에 나와있듯, 구약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더불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말과 나귀의 상징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왕이 전쟁에 나갈 때는 말을 타지만, 평화시에는 나귀를 탑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을 타셔야겠지만, 예수님은 전쟁을 위한 왕으로 오심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에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상징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귀새끼도 그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누구집의 나귀새끼인지, 어떤 색깔인지, 어떤 품종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나귀 새끼는 영문도 모른채 끌려왔습니다. 나귀새끼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아직 아무도 태워보지 못한, 그야말로 아직 나귀새끼입니다. 등짐을 져본 적도 없고, 사람을 태워본 적도 없는 나귀새끼입니다. 그런 나귀새끼가 성인남자를 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 속에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나귀 새끼는 엄청나게 귀한 일에 쓰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귀가 돼라.” 어떻게요? 누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 그게 바로 나귀새끼가 되어 예수님을 등에 태우는 것입니다. 종려주일 이 아침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삶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주의 몸 된 제단을 위해서, 주님 나라를 위해서,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귀새끼 한 마리처럼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걸어가는 우리의 걸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유월절이 임박했을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절기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환영을 합니다. 

  

종려나무는 다 베어버리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워도, 시간이 지나면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고 자라날만큼 불사조 같은 나무라고 합니다. 실제로 종려나무의 식물학 이름에는 불사조를 뜻하는 “피닉스”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승리와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가 깔면서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책망하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바리새인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을 향해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간 행했던 모든 기적의 역사들, 그런 권능을 통해서 세상을 뒤엎어 달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외치는 건, 반란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0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침묵하면 저 돌들이라도 일어나서 외칠 것이다. 예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온 세계만물의 왕이 되십니다. 우리가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일어나서 외칠 것입니다.  

  

우리가 돌들에게 찬양의 귀한 특권을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찬양, 우리의 감사, 우리의 고백이 끊어지면 그 귀한 특권을 다른 사람에게, 다른 미물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거예요. 특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힘 닿는 순간까지 내 입술로, 내 삶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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