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34)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34)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사도행전 16:6~10>

제목에서부터 이미 짐작하실 수 있듯이 오늘은 선교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코로나 이전까지 거의 매년 피지에 있는 나꼬르교회, 남부타교회, 나몰리교회로 단기선교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금년에도 교회예산과 남녀선교회에서 후원한 선교비를 통해 선교지와 미자립교회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피지에 있는 나꼬르교회 장판 교체하였고, 피지 지역에 마스크를 지원하였으며, 아프리카 잠비아의 광림선교센터와 아프리카의 모리타니 이슬람공화국의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특별히 마다가스카르는 지금 이상기후로 인해 남부지역의 사람들이 거의 “아사-굶어죽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누군가는 현지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또 누군가는 뒤에서 기도와 물질로 도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섬김과 헌신으로 모아질 때에,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은 복음 전파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인물입니다. 이러한 복음 사역을 위해 돕고 협력한 많은 손길들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바울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더 많은 돕고 협력하는 이들도 필요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오늘 바울이 들은 이 음성을 우리도 마음에 새기고, 내게 주신 복음의 사명 감당하고자 결단하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복음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늘 마음에 부담이 있죠. “내가 어떤 말을 전해야 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수 있을까?” 하지만 복음의 역사는 내 말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복음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한국이 있는 아시아가 아니라, 소아시아지역으로, 지금의 터키 좌측의 에게해 연안지역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도착한 곳이 드로아라는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중에 환상을 봅니다. 바울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함으로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을 향한 복음전파의 첫 번째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마게도냐에 가게 됩니다. 그럼 마게도냐에서 뭔가 드라마틱한 역사가 딱 일어나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 복음활동 중에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했음에도 계속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이끄신 것이고, 자신은 그 뜻에 순종하는 걸음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한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나의 기대대로 무언가 성취되지 않을지라도, 그 안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헌신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복음의 사명에 순종하는 것 자체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비를 통해 간접적으로 선교에 동참하는 것, 또한 내 개인의 삶 속에서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것, 이 모든 복음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주의 뜻에 순종할 때에 더 큰 역사를 보게 됩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 도착해 빌립보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11절부터 보면, 빌립보에서의 전도활동이 나옵니다. 바울은 보통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날 강가로 내려갑니다. 당시 회당이 없는 곳에서 유대인들은 보통 강가에서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 유명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되죠. 루디아는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바울 일행에게 개방하면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곳이 유럽의 첫 번째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이후 바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됩니다. 빌립보에서의 선교사역을 위해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개방하고, 바울과 그 일행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줍니다. 이후에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루디아를 만나 복음의 확장이 안정적이고 평안하게 잘 이루어질 것만 같았는데, 어느 날 바울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 주었다가,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서 밤새도록 찬송을 부릅니다. 이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려지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죠. 이 일로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 가족들이 다 세례 받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어서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보와 달리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가히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곳에서도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폭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바울 일행은 다시 한 번 옥에 갇히게 되지만, 당시 바울이 머물고 있었던 집 주인 야손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세워진 교회가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로 칭찬받는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18장에 가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곳에 고린도교회가 세워집니다. 이어서 19장에 가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에베소 교회가 세워집니다. 

  

여기까지가 마게도냐로 가라는 환상 이후에 이룬 바울의 복음사역의 모습입니다. 마게도냐로 가라는 음성에 순종함으로 네 개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또한 가는 곳마다 어려움과 박해를 당했지만,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넘어서게 하는 기적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바울이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때마다 시마다 필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자 사모했던 소아시아 지역의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2차 전도여행을 마치게 하시고, 또한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일어난 역사입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주의 뜻에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에, 반드시 더 큰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오직 주의 뜻에 순종함으로 더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주의 사명 감당할 수 있음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저에게 2002년은 상당히 기억에 남는 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4강에 진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처음으로 단독목회를 나갔던 해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목회를 나가서 열심히 하면 교회가 금방 부흥되고, 뭔가 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같은 지방에 속한 몇 교회에서, 제가 예전에 교육전도사로 있었던 교회에서 10만원, 5만원씩 보내주시는 선교비였습니다. 당연하게도 후원해 주신 분들께 제가 다시 갚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저는 그때 받았던 도움을 생각하면서, 작게나마 다른 선교사에게, 또는 미자립교회 목회자에게 개인적으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의 성도님들과 함께 교회적으로, 또는 남녀선교회의 헌신을 통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물질적인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선교라는 게 그렇더라구요. 누군가를 향해 섬기고 베풀고 돕는 손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서 꼭 그 사람에게 되갚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또 그것을 다른 곳에 흘려보냅니다. 이게 아름다운 선순환입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강한 손길로 등을 떠미신다고 선뜻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위해서 기도하는 것, 교회적으로, 남여선교회에서 함께 협력함으로 선교비로 후원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더해져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집니다. 지금도 바울처럼 세계 곳곳에서 복음의 사명 발로 뛰며 감당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또한 루디아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야손처럼, 복음의 사명을 위한 많은 협력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기도와 헌신으로 협력함을 통해 이 시대의 루디아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야손으로 쓰임 받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내게 주신 복음의 사명 힘써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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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21-09-27 18:29:07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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