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역사 (4)박해의 원인과 순교의 의미
4. 박해의 원인과 순교의 의미
4-1. 박해의 원인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100여 년 동안은 박해 시대라고 할 만큼 교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물론 박해와 박해 사이에는 일종의 휴지기도 있었지만, 박해를 강행하는 정부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조선 왕조의 정부에서 단행한 천주교 박해의 원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박해의 원인을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받들던 사회다. 당시 성리학은 정치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구실까지 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사상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것은 집권층의 주요 임무였다. 그런데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던 당시에는 성리학이 여러 방면에 걸쳐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는 집권층의 정치 사상과 통치 능력이 부인되고 있다는 말도 되는데, 당시 집권층은 이런 현상에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오면서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각종 사회 원리를 부인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펴 나가고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부인하였으며, 당시 사회 풍습과는 달리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마저 일종의 미신 행위로 간주하며 조상 제사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였다. 이는 조상 제사로 상징되던 일체의 구제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여, 당시의 집권자들은 천주교가 성행하면 양반들이 존중하는 유교가 무너지고, 양반의 권위도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당시의 집권층에서는 전통 가치를 보존하고 양반의 정치적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또한 신자들은 하느님을 왕보다 더 높임으로써 가장 높은 존재로 여기던 왕의 지위를 하느님 아래에 놓았다. 그리고 양반층의 공통된 의견이며 왕의 명령인 실정법에서 천주교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 법을 어기며 계속해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심법이 양반 사대부의 법보다 더 존귀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와 양심을 국가의 권위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아 온 동양 문화의 전통에 젖은 집권층에서는 신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집권층은 천주교인들이 왕과 양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한편 부패한 관리들은 교회 탄압을 가중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니, 이들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한 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정식 명령을 받지 않고서도 관리들은 천주교인들에게 사사로이 박해를 가하였다. 또한 박해 시대 신자들은 집안의 형제 친척과 이웃들한테서도 박해를 당하였다. 당시 신자들은 일종의 정치범이며 사회 풍속을 혼란시킨 풍속 사범, 이질적인 사상을 가진 사상범으로 처벌되었다. 연좌제 적용을 받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심하게 탄압함으로써 자신과 가문을 지키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 박해는 조선 왕조의 독특한 정치 문화와 가족 제도 때문에 더욱 심화되어 갔다.
박해가 진행되자 신자들은 관원의 눈을 피해서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부패한 관리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들은 틈을 타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도적이 되어 관리들과 토호들을 괴롭혔다. 그런데 박해를 피하려고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들도 이들처럼 비밀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비쳤으며,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민중 봉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 때문에 집권층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도둑 떼와 같이 여겨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상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한편 박해가 일어난 데에는 당시 교회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동양에 천주교가 선교되던 초기와는 달리, 교회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너무도 인색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의 미풍양속에 속하는 조상 제사마저 미신으로 여겼다. 교회 당국의 이와 같은 생각은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까지 해석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천주교 박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조상 제사의 금지는 박해의 빌미가 되었고 당시 교회 지도층의 편협한 태도에서도 박해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회는 1930년대에 이르러 조상 제사에 관한 문제를 다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조상 제사가 지닌 부모에 대한 효성만을 올바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인들은 조상 제사를 떳떳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4-2. 순교의 개념과 의미
신앙의 자유를 얻기 이전 조선의 교회는 언제나 박해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물론 박해가 항상 강박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해가 일어나면 신자들이 체포되어 신문을 당하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천주교 신앙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다. 정부는 신자들을 ‘회오'시켜 ‘사학'인 천주교를 버리고 ‘정도'인 성리학적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회유하고 고문하였다. 당시의 정부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그 ‘범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100여 년에 걸쳐서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박해에서 얼마나 많은 신자가 체포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유지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866년에 발생하여 수 년 동안 지속된 박해 과정에서 서울의 좌우 포도청에 체포되었던 신자들에 관한 기록을 분석하여 이에 관한 이해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당시에 작성된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에는 전국에서 체포·압송해 온 408명의 신자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취조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신앙을 관철했던 신자들은 35%에 이르고 있다. 반면에 신문 과정에서 배교를 선언한 신자는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51%에 이르렀다. 신교와 배교 여부가 미상인 기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였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죽임을 당한 신자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는 순교의 개념을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곧 광의의 개념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 행위 모두를 순교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순교(martyreo)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증언하다', ‘증거 하다', ‘증인이 되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데에 착안한 개념 규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순교라 할 때에는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교를 협의로 규정할 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순교자는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둘째, 그 죽음이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초래되어야 하고, 셋째,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사람이어야 한다. 박해 시대의 교회사에서는 무수한 광의의 순교자들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들 가운데 대략 1,800여 명에 이르는 협의의 순교자들을 주목하여, 이들의 죽음, 순교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아가서 순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궁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사의 박해 시대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박해 시대에 처형된 신자들 가운데에는 신앙보다는 현실 정치 문제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순교는 초자연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순교는 이성 차원의 합리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들은 평시에도 복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생활을 해 왔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을 생활 안에서 실천해 왔다. 그들은 성사 생활에 철저하고자 했고, 인간을 존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를 일치시켜 왔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도 그리고 죽음의 마당에서도 줄기차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한편 그들의 순교에는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 실천과 순교는 자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당시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신분제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발견이었다. 순교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이다. 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전선에서 산화한 전사자이기도 한데, 그들의 순교는 신앙 행위였을 뿐 아니라 사회·역사 행위로,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게 되었다. 이 역사 행위를 한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오늘날의 우리처럼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망과 희망을 번갈아 가지며 고뇌하기도 하였지만 참다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평범한 이 사람들이 실천한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주는 것이다. 순교자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고 역사화(歷史化)함으로써 순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오랜 박해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사에서는 부정적 측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박해에 시달린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내세에만 안주해 보려는 도피적 신앙 태도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박해의 여파로 일부 신자들이 복음화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고 실천하기보다는, 이를 성직자에게만 맡기려는 피동적 모습이 간혹 드러났다. 계속되는 박해로 신앙 교육이 어려워지자 일부 신자들은 개인주의적이며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신앙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도 계속 병폐로 남아 있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다.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http://www.cbck.or.kr/page/page.asp?p_code=K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