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물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34절) 이 구절에 마음이 뺏겼다. 글을 쓰지 않을 때도 곱씹었고, 글을 쓰면서도 곱씹고 있다. 예수 시대의 보물은 단순히 금, 은, 보석만도 아니고 귀한 먹거리도 보물이었단다. 어떻게 보면 입으로 들어가 뒤로 나오는 숱한 먹거리도 보물로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순수하기까지 하다.
마음을 두는 건 수시로 변한다. 적어도 내 경험칙은 그러하다. 사람이 그랬고, 물건이 그랬다. 귀한 것일수록 마음의 변덕이 죽을 쑤듯 들끓는다. 돌이켜 이유를 캐물으면, 답은 그리 복잡지 않았다. 비교하니까, 자꾸만 뭐가 더 귀하고, 뭐가 더 내게 이익이 되는지 이기적 셈법을 해 대니까… . 속은 늘 계산하느라 바쁘기만 했다.
오늘 복음을 두고 주인을 향한 ‘일편단심’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한 종은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이고, 기다림에 충실한 이라고 단정하면서 말이다. 이런 해석은 대개 갑을관계,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주입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종은 종이어야 하고, 주인은 위대해야 한다는 계급 논리를 바탕으로 종의 겸손함이 강조된다. 이 겸손함은 비교 우위를 이미 인정해 버린 자기 비하의 또 다른 면을 숨기고 있는 건 물론이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이러한 계급 논리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오히려 종처럼 행동한다. 허리에 띠를 매고 식탁에 앉히고 시중 드는 주인은 심지어 자신의 재산을 충실한 종에게 죄다 맡겨 버린다. 주인이 종이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그래서 주인이냐 종이냐의 문제는 애시당초 복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인이 종이 될 수 있는 건, 오로지 종의 충실성에 기반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일, 곧 세상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의 충실성에서 가능했다.(요한 13,4) 주인으로서 아니면 종으로서 또 아니면 다른 어떤 이로서 우린 세상에서 살아간다. 주인과 종, 사장과 노동자, 정치인과 백성이라는 ‘관계적 프레임’ 안에서 우리 삶을 조망하는 태도는 어쩌면 우리 삶의 충실성에 걸림돌이 된다. 오히려 어떠한 삶이든 그것이 가지는 본디 가치와 역할을 고민하고 제 삶의 기본과 권리에 충실한 이들이 하느님나라에 어울리는 이들이다.
관계 속에 따지고 계산하다 보면 제 삶의 가치엔 불충한 결과를 초래한다.(루카 12,45) 불충한 종은 방종한 삶을 산 게 아니라, 계산된 삶을 살았다. 주인이 언제 올지 나름 계산했고, 계산한 만큼 자신의 삶을 잃었다. 늘 깨어 기다리고 준비한다는 건,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함이다.(12,40) 준비한다는 건 시간적 결승점을 향해 나가는 일시적 혹은 한계적 집중 코스를 체험하는 게 아니다. 준비는 일상이고, 그 끝을 모를 만큼 평범한 게 준비한다는 거다.(1테살 5,2)
불충실한 종은 ‘처단된다’. 처단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디코토메오는 ‘두 조각으로 자르다’란 뜻을 지녔다. 이 표현은 불신을 지닌 이들에 대한 전통적 심판의 표현이었다.(2사무 12,31; 1역대 20,3; 탈출 29,17; 에제 24,4) 관계 속에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유폐시키거나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둘로 쪼개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심판은 자기를 살지 못하는 이가 자기를 찾고자 하는 역설적 반영일 수 있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 게 구원이고, 비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할 수 있는 게 제 삶의 보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