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손에 제 영혼을 맡깁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미켈란젤로의 종교적 감수성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 예순에 비토리아 콜론나를 만나면서 비롯되었다. 여류시인이며 후작 부인이었던 콜론나는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어 수녀원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교황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는 교회개혁을 지지했으며, 종교개혁자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종교재판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녀는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같은 ‘여걸’ 부류였으며 ‘신성한 정신을 사랑한’ 존경받을만한 귀족이였다.
미켈란젤로와 비토리아 콜론나는 교회에 비판적이었으나 가톨릭교회를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 깊이 결합될수록, 성직자들이 가장 큰 순수성과 애덕을 지니기를 갈망했고,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성직자들을 통해 불완전하게 대변되는 것을 보고 괴로워했다.
미켈란젤로와 콜론나는 ‘종교적 우정’을 이어갔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그는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고 부르짖으며 괴로워했다. 젊었을 때 신플라톤주의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의 관념세계를 흡수한 미켈란젤로는 콜론나와의 이런 우정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 평전>을 쓴 콘디비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그녀의 손에만 입을 맞추었을 뿐 이마나 얼굴에는 입 맞추지 않은 것이 몹시 애석하다고 말했다.”
비토리아 콜론나는 평온한 사람이었고, 자주 폭풍처럼 들끓던 미켈란젤로의 정서를 진정시키는 힘을 지녔다.
미켈란젤로는 아흔 살이 될 정도로 장수했지만, 그가 말년에 집중한 것은 역시 ‘죽음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만 가지 생각 중 죽음이라는 말이 새겨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이 감각은 오래도니 것이다. 그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로마에 있는 자기 집 안 계단 벽에 관을 짊어진 해골을 그리고 이런 무시무시한 글을 남겼다.
“세상에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다 내준
너희에게 말하노라!
너희가 누울 곳은 바로 이 어두운 궤짝 속이다!”
아흔 살의 미켈란젤로는 “나는 늙었고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는데, 노년의 그는 젊은 시절의 그와 딴 사람이 되었다. 이 전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베드로의 십자가형>과 <바오로의 회심>이다. <바오로의 회심>에서 말에서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바오로는 눈을 감고 있다. 세상을 초월한 빛이 그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모세>와 <최후의 심판> 마저도 ‘미혹의 결과’라고 고백한다.
“나는 옛 시절의 달콤한 미혹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
이 미혹은 거기에 걸려든 자의 영혼을 파괴해 버린다.
이제 나 스스로 증명하노라.
태어난 순간부터 가장 빠른 지름길에서
죽음을 향해 눈을 돌리는 사람,
천국에서는 다름 아닌 이런 사람에게
가장 큰 행운이 기다리고 있노라.”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영웅’을 극복해야 했다. 혼자만 고귀하고, 그리스도교에 있는 영원한 여성성을 업신여겼지만, 말년에는 콜론나를 만나면서 이 여성성 앞에서 무너졌다.
미켈란젤로는 이제 자신만만한 자신이 하느님의 맷돌에 으깨어졌음을 깨달아야 했다.
“붓도 글도 내게 평온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만이
내게 평화를 가져다준다.”
불세출의 조각가가 말년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두 팔로 피신한다. <최후의 심판>에서는 자신을 살가죽이 벗겨진 자로 묘사했으나,정작 아무 죄 없이 살가죽이 벗겨진 분은 그리스도임을 깨닫는다. 그분의 수난이 나의 구원을 보증할 뿐이다. “내 힘으로”를 포기하는 순간이다. 고통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었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작업한 <십자가형> 소묘는 특별하다. 이 그림에선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서 보이는 주변경치와 인물의 동작 등은 별로 의미를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미켈란젤로는 비장함을 동반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표현하고 싶은 인물만 묘사한다.군더더기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의 모습을 본받기 위해서는 훌륭하고 재주 많은 화가의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려면 흠 없는 삶, 되도록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이해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다.”
이 시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피에타’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여러 차례 조각하였는데, 노년에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와 만든 작품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이다. 이것은 그가 세상에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강한 파토스의 소유가 가장 고요한 피에타를 만들었다. 서로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두 형상에는 이름이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여기에는 예전에 성모께 입혔던 화려한 아름다움이 없다. 구세주는 성모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버리고, 고문의 고통 때문에 갑자기 탈진하고 짓눌린 모습이다.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성모는 절망적으로 죽은 아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들의 가냘픈 몸은 형체마저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며, 그의 얼굴은 완전히 망가져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입은 보이지 않으며, 반쯤 감은 눈은 땅을 바라보면서 마치 관 속의 어둠과 안식을 찾는 듯하다. 이 별것 아닌 육신의 껍질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을 담아내고 있다.
이 피에타만큼 복음서에 드러난 그리스도교 정신을 잘 드러내는 작품은 없다. 노년의 미켈란젤로가 발견한 그리스도교 정신은 권력, 무게, 그리고 위엄과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에는 사람이 아들이 처한 통절한 절망과 측은함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미켈란젤로는 여기서 강림한 하느님의 극단적인 수치를 보았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희생자가 보여준 가없는 사랑의 애절한 증거를 보았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정말 거룩한 분과 대면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임을 전해준다.
사망하기 이틀전까지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쪼던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14일 임종시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손에 영혼을 맡깁니다. 그의 육신은 이 땅에, 그의 재산은 친척 어르신께, 맡깁니다. 이승을 뜨는 순간에 예술의 고통을 기억하자고 가족들에게 청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