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
<1858년 10월 13일~1932년 6월 2일>
‘확실히 부풀어 오르는’ 베이킹파우더로 식생활 혁명
토머스 에드먼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한
크라이스트처치 시는 조기(弔旗)를 걸었다.
장례식에서 조사를 한 대니얼 설리번 시장은
“토머스 에드먼즈의 죽음은 가장 훌륭한 자선사업가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뜻한다”며 아쉬워했다.
동양 사람들 주식이 쌀이라면 서양 사람들 주식은 밀로 만든다. 서양 사람은 빵 피자 케이크 같은 밀가루를 재료로 한 음식을 하루 세끼 먹는다. 뉴질랜드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는 꼭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만을 다루는 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걸 만들어낸 사람도 역사는 잊지 않는다. 토머스 에드먼즈가 그런 사람이었다.
결혼식 뒤 곧바로 뉴질랜드행 배 타
토머스 에드먼즈는 1858년 10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0대 무렵 제과회사에서 일하면서 밀가루와 친해졌다. 그는 스물한 살에 같은 날 태어난 제인 어빈(Jane Irvine)과 결혼했다. 식을 올리자마자 두 사람은 푸른 꿈을 안고 뉴질랜드행 배에 몸을 실었다.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 남섬에서 제일 큰 도시)에 도착한 새내기 이민자 토머스 에드먼즈는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빵 장사였다. 생각보다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타개책 마련에 골몰하던 그의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주부들 걱정을 속 시원히 해결해주면 판매량은 물론 사업을 넓혀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밀가루 반죽을 잘 부풀게 할 수 있는 촉매제였다.
19세기 중반 뉴질랜드 주부들은 빵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호주나 영국에서 수입해 쓰는 베이킹파우더 질이 들쑥날쑥이라 빵을 만들 때마다 본의 아니게 색다른 맛과 질을 느껴야만 했다. 맛있는 빵을 만들어 사랑하는 식구에게 주고자 했던 마음을 아쉽게도 베이킹파우더가 맞춰주지 않았다.
토머스 에드먼즈는 뉴질랜드 주부에게 딱 맞는 베이킹파우더를 만들어내려고 3년을 투자했다. 드디어 맞춤형 베이킹파우더가 뉴질랜드 식탁에 선보였다. ‘에드먼즈 베이킹파우더’(Edmonds Baking Powder)였다. 빵 장수 토머스 에드먼즈가 역사의 마당으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3년이나 공을 들인 베이킹파우더는 처음엔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다. 제품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때 토머스 에드먼즈가 내놓은 게 밀가루 반죽이 잘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돈을 돌려주는 이른바 ‘머니 백 개런티’(Money Back Guarantee)였다. 제품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토머스 에드먼즈는 베이킹파우더 이름을 ‘에드먼즈 슈어 투 라이즈’(Edmonds Sure to Rise)로 정했다. 토머스 에드먼즈가 만든 베이킹파우더를 쓰면 밀가루 반죽이 ‘확실하게 부풀어 오른다’는 뜻이었다. 둥근 해가 떠오르면서 세상이 밝게 빛나는 제품 로고도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한 해 250만 깡통 팔려 나가기도
결코 과장 광고가 아니었다. 곧 주부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굳이 호주나 영국 베이킹파우더를 사다 쓸 이유가 없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베이킹파우더만큼은 영국이나 호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토머스 에드먼즈가 개발한 베이킹파우더는 1912년까지 해마다 100만 깡통 이상 팔려나갔고 이듬해에는 250만 통을 넘어섰다.
베이킹파우더가 잘 팔려 나간 또 다른 이유는 토머스 에드먼즈가 직접 만든 요리책이었다. 50쪽 분량의 『에드먼즈 쿠커리북』(Edmonds Cookery Book)은 주부들 필독서였다. 어느 집이든 주방에 한 권씩 두고 있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 맛있게 요리하는 법, 요리할 때 주의할 일 등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그때에는 ‘눈에 확 띄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350만 권이 넘게 팔렸다. 뉴질랜드 출판 역사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오늘날까지도 주부들 사이에서는 ‘요리책의 바이블’로 꼽히고 있다.
주부들 빵 요리 문제를 해결해준 토머스 에드먼즈는 곧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유명인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키위들은 그를 돈만 많이 번 사업가로 기억하지 않는다. 크라이스트처치가 ‘가든 시티’(Garden City, 정원 도시)란 애칭으로 불리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 토머스 에드먼즈였다.
공장 옆에 멋진 공원 꾸며
그는 1923년 공장을 옮기면서 인근에 공원을 하나 만들었다. 직원은 물론 시민들이 마음껏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공원은 크라이스트처치의 명물이 됐다. 야외 결혼사진 장소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공원은 크라이스트처치 시 소유로 넘어갔다. 토머스 에드먼즈는 공원을 비롯해 시계탑, 원형 음악 홀 같은 여러 건물을 지어 시에 기증했다. 이들은 시간이 흘러 크라이스트처치 관광 안내책에 나오는 명소가 됐다.
1932년 토머스 에드먼즈는 호주 시드니 하버 브리지(Sydney Harbour Bridge) 개통식을 보고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한 크라이스트처치시는 조기(弔旗)를 걸었다. 한평생을 크라이스트처치 시민들과 시의 발전을 위해 살아온 토머스 에드먼즈는 그렇게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장례식에서 조사를 한 대니얼 설리번(Daniel Sullivan, 1882~1947) 시장은 “토머스 에드먼즈의 죽음은 가장 훌륭한 자선사업가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뜻한다”며 아쉬워했다.
해마다 200여 종류의 음식 만들어
토머스 에드먼즈가 세운 회사는 해마다 블루버드푸드(Bluebird Foods)라는 이름으로 200여 종류에 가까운 새 상품을 만든다. 베이킹파우더로 식료품 세계의 큰 부분을 담당해 온 이 회사는 오늘도 주부는 물론 모든 키위가 믿고 쓸 수 있는 제품을 내놓고 있다.
역사는 토머스 에드먼즈를 단순히 베이킹파우더를 만든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도 따듯한 마음씨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면 역사의 한 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었다.
참고로 토머스 에드먼즈는 경제공황 때 뉴질랜드에서 맨 먼저 주 5일 40시간 근무제도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글: 박성기>